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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옥동서원(사적 532호)

출입문이 잠겨있어 오른쪽으로 돌아가서 담넘어로 촬영했네여. 상주 옥동서원은 고려 말 3명의 국왕과 조선 초 4명의 국왕을 모신 충신으로 조선 초 유학의 기반을 마련하고 유교 숭상 정책을 주도하였던 대표적인 인물인 방촌 황희 (尨村 黃喜, 1363∼1452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옥동서원은 1518년 횡당(黌堂)을 세워 황희의 영정을 모신 것이 효시로, 1580년 백옥동 영당(白玉洞 影堂)이 건립되면서 황희를 배향(配享, 신주를 모심)하였다. 1714년 서원으로 승격되면서 전식(全湜, 1563~1642년)을 배향하였으며, 1786년 황효헌(黃孝獻, 1491~1532년)과 황뉴(黃紐, 1578~1626년)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1789년에는 조정으로부터 현재의 명칭인 ‘옥동서원’으..

상주 복룡동 유적(사적477호)

유적이 어린이놀이터 테마숲 안에 있는줄 알았다. 지나는 주민께 물어보니 반대편 공원에 있단다. 반대편 공원이다. 지나는 주민에게 유적을 물으니 모른단다. 길가에 안내판이 있다. 「상주복룡동유적」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의 생활유구가 전 지역에 분포하고 있어 상주시 고대도시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으며 서민생활상을 복원, 연구하는데 역사적 가치가 있는 매우 중요한 생활유적이다. 상주복룡동유적지는 2004년 대한주택공사 등에서 택지개발하기 위하여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의 건물지, 연못, 수혈유구(竪穴遺構), 구상유구(溝狀遺構) 등과 도기류, 와·전류, 자기류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건물지와 우물 등 생활유구 들은 상주읍성지의 동편 외곽에 거주한 서민들의 생활상을 알 수..

상주 복용동 석조여래좌상(보물119호)

왕산 정상인 장원봉 상주 왕산역사공원내에 있는 백우정. 채색이 틋이하네여. 석불이 위치한 곳은 상주의 명산으로 알려진 왕산의 동쪽 중간쯤이다. 이 석조여래좌상이 위치해 있던 곳은 상주시 복룡동 358번지였으나, 1975년 10월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콧날이 약간 손상된 얼굴은 둥글고 풍만한데, 가늘게 뜬 눈, 작고 도톰한 입술 등에서 인간적이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어깨는 현저히 좁아졌고, 오른손은 없어졌지만 두 손이 아래위로 겹쳐진 모습으로 보아,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손모양으로 생각된다. 몸 전체를 두껍게 감싼 옷은 양 어깨에서 부채꼴 모양을 이루며 좌우로 대칭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의 표현은 부드러우면서도 형식적으로 처리된 모습이다. 이 불상은 전반적..

상주향교 대성전‧동무‧서무(보물)

동무 서무 2020.12.28에 보물로 되었는디 아직도 유형문화재라고 그대로 있네여. 상주향교」는 조선시대 향교의 기능에 따른 건물과 배치구성, 지방행정체계에 대한 설위형식이 지역별로 시기적 변화양상이 있었음을 밝힐 중요한 건축사적 특성을 가진 건물임. 동무․서무는 건축 연혁이 명확하고 조선중기에 중창된 뒤 위치의 변경이 없으며, 대체적으로 당시의 구조양식 등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음. 특히 정형화되고 엄격한 배치구성이 돋보이며, 문묘 다음으로 큰 규모이며, 경사 지형을 고려한 탁월한 입면구성을 갖추고 있음.(출처 : 문화재청)

공주 이귀의 묘(충청남도 기념물 제183호)

전에 이귀의 신도비는 보았는데 묘는 처음이다. 이귀는 정몽주 선생과 관련이 있다.(용인 정몽주선생 묘(경기도 기념물1호) (tistory.com)) 마을 가운데 도로로 올라 간다. 직진으로 간다. 왼쪽으로 간다. 오른쪽 산으로 올라 간다. 는 매장형태는 부인 인동장씨와 합장묘이고, 분묘의 수량은 단분(單墳)이며, 봉분의 외형은 원분(圓墳)이다. 봉분에는 타원 모양의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장대석으로 호석을 둘렀으며 묘역은 계체석(階砌石)으로 계절과 배계절로 나뉘어 있다. 계절에는 묘소와 묘표석, 혼유석, 상석이 있고, 배계절에는 상석 바로 앞 좌우에 동자상 1쌍이 있다. 향로석 및 좌우에 1쌍의 문인석과 망주석이 있다. 는 조성형태가 조성당시의 정형성을 보여 주고 있고, 석물도 조성시기가 분명하여 시대 ..

연평부원군신도비(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9호)

다시가 본 연평부원군 이귀 신도비 (공주 연평부원군 신도비(충청남도 유형문화재89호) (tistory.com))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놓은 비를 말한다.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귀(1557∼1633) 선생을 기리고 있다. 이귀는 이이·성혼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군인을 모집하여 나라를 구하는데 힘썼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오르게 하는 인조반정때 공을 세워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그후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한돌로 이루어진 비몸과 머릿돌을 세웠다. 거북받침돌은 머리를 수평으로 내밀고 있으며,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과 구름을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나타내었다. 비문은 조익이 글을 짓고, 오준이 글씨를 썼으며..

숭선군묘(충청남도 기념물 제6호)

다시 찾아가본 숭선군 묘.(공주 숭선군 묘(충청남도 기념물6호) (tistory.com)) 공주 오룡리귀부에서 바라 본 숭선군 묘(사진 중앙 위에 있다) 주차 시설도 생겼다. 묘는 하우스와 건물 사이로 올라간다. 진입로도 새 단장되었다.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의 다섯째 아들 숭선군의 묘소이다. 군의 이름은 징(徵)이며, 시호는 효경(孝敬)이다.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를 따라 공주(公州)로 잠시 피신한 일이 있었는데, 궁으로 돌아와서도 항상 공주를 그리워하더니 숙종 16년(1690) 세상을 떠날 때 공주에 묻어 줄 것을 유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왕족의 무덤은 도성(都城)에서 90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법 때문에 중단되었고 그 후 후손에 의해 다시 이곳으로 옮겨져 만들어..

공주오룡리귀부(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

다시 찾아가본 공주 오룡리 귀부(공주 오룡리귀부(충청남도 유형문화재61호) (tistory.com)) 사진 중앙 위에 숭선군 묘가 보인다. 귀부는 비받침부분을 일컫는 말로, 대개 거북 모양을 띠고 있다. 이 귀부는 조선 제 16대 임금인 인조의 아들 숭선군의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가까이에 세우는 비)를 세우기 위해 만든 것이나 비를 세우지 못하고 중단되어 귀부만 남은 것이다. 숭선군은 이름은 징(徵)이고, 인조의 다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인 조씨(趙氏)이다. 효종 2년(1651) 누이인 효명옹주의 시할아버지 김자점의 역모에 관계되었다 하여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효종 7년(1656)에 석방되어 벼슬과 지위를 되돌려 받았다. 귀부는 네모난 바닥돌과 큼직한 한돌로 만들었다..

영동 신항리 상여(충청북도 민속문화재 제10호)

율리교차로에서 용산면사무소 방향으로 가는 중이다. 구촌교를 지나 오른쪽에 상여가 있다. 건물이 서향으로 지는 해를 받게 되어 있어 문화재 휀손이 우려된다. 이용강 대감의 장례 때 시신을 묘소까지 운반하기 위해 제작된 기구이다. 이용강은 조선 고종 때 경상감사와 공조판서를 지낸 분으로, 영동 황간으로 낙향하여 노년을 지내었다 한다. 상여는 세도있는 양반가의 것으로서, 민간층에서 사용하는 상여와는 다르게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긴 멜대를 중심으로 한 기본틀 위에 관을 싣는 몸체를 올리고 맨 위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한 천을 넓게 드리웠다. 몸체의 아래 위에는 난간을 두르고 검은 천을 덮은 뒤 색띠와 술을 늘어뜨렸다. 윗 난간에는 동방삭(삼천갑자년을 살았다는 전설 속의 인물)으로 보이는 인물상을 여러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