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팔송 윤황 묘역
윤황(1572~1639)선생의 호는 팔송이며,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에 터를 잡고 파평윤씨 노종파의 근간이 되게 하신 참판공 윤창세(1543~1593)의 둘째 아들이다. 참판공은 50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자 깃발을 꽂고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며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윤황은 8명의 아들(훈거, 순거, 상거, 문거, 선거, 민거, 경거, 시거)를 두었는데 모두가 훌륭하였다. 윤증은 임금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많은 벼슬을 받았던, 그러나 벼슬을 하지 않았던, 백의 정승이라 하며 우암 송시열과 맞서 당파 싸움했던 소론의 영수 윤증(명재 윤증 특별전, http://blog.daum.net/dbsqkqh/1193)은 다섯째 아들인 선거의 아들이다. 본인은 넷째 아들인 석호 윤문거의 후손이다. 둘째 아들인 동토공 순거는 큰아버지인 설봉공 수에게 양자로 감.
윤황 묘역은 논산 윤황선생재실(충청남도 문화재자료391호, http://blog.daum.net/dbsqkqh/3913) 뒷편에 있고, 근거리에 논산 윤황선생고택(충청남도 민속문화재8호, http://blog.daum.net/dbsqkqh/3912)이 있다.
윤황은 아래 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논산 노강서원(충청남도 유형문화재30호, http://blog.daum.net/dbsqkqh/4002)
전주 반곡서원(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호)
노성면소재지 방향으로 약 5km 가면 논산 명재고택(중요민속문화재190호, 명재 윤증은 윤황의 손자, http://blog.daum.net/ dbsqkqh/1367)이 있다.
윤황 선생은 조선조 선조 4년인 1572년에 태어나서, 인조 17년인 1639년에 세상을 떠난 문신이다. 자는 덕휘, 호는 팔송으로, 선조 30년인 1597년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주서, 감찰, 정언, 좌랑등의 관직을 거쳐 북청판관, 영광군수 등의 외직을 거치고 시골에 은거하였다. 이조반정 이후 다시 출사하여 장령, 집의, 사간 등의 관직을 지내던 중 정묘호란 때 화친을 반대하는 소를 올려 체직되었다. 이듬해 복직하여 안변 부사, 대사성, 대사간·이조참의, 전주부윤 등을 지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척화를 주장하였다. 1637년 김상헌, 정온 등이 병자호란 때 화의를 반대했다는 죄로 청에 붙잡혀 갈 때, 윤황은 대신 잡혀 가겠다고 했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척화신중 삼학사인 윤집, 오달제(http://blog.daum.net/dbsqkqh/1609), 홍익한(http://blog.daum.net/dbsqkqh/2677)은 불모가 되어 심양으로 잡혀가고 공은 동양위, 신익성의 도움으로 영동으로 유배되었고, 이듬해(1638년) 겨울 풀리시어 노성으로 귀가하셨다가 1639년 69세로 돌아가셨다. 선생의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논산의 노강서원, 영광의 용계사우, 영동의 초강서원, 전주의 반곡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팔송봉사』가 있다. 호가 팔송인 이유는 공이 사신 곳이 남별영이 있던 지금의 필동으로 소나무 8그루가 둘러 쌓여 있었고 이곳에서 샘이 솟아올라와 팔송정이라 불리운데서 비롯된 것으로 공의 사부이며 후에 장인이된 성리학의 대가인 우계 성혼이 명명해 주셨다. 성혼선생묘(경기도 기념물59호, https://blog.daum.net/dbsqkqh/4653)는 경기도 파주에 있다.
본인은 팔송 윤황의 넷째 아들인 석호공 문거의 후손이다. 팔송은 성혼의 사위이고, 손자 며느리는 우암 송시열의 따님이다.
앞에 크게 보이는 비가 윤황 묘비명이고 윤황묘는 중앙에 있다.
윤황묘비명
뒤에 보이는 건물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391호인 윤황선생재실이다.
윤황의 큰아들인 고산공 훈거(1591~1639) 묘. 고산현감, 좌승지 증직
조선 중기의 문신 윤경교(尹敬敎, 1632~1691)의 묘이다. 할아버지 윤훈거, 증조할아버지 윤황묘역에 같이 있다. 묘 앞에는 2단으로 된 상석이 있고 양쪽에 동자석이 있다. 묘 옆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앞면에는 윤상봉(尹相鳳)이 쓴 묘표를 대자로 새겨 넣었고 뒷면에는 이상황이 짓고 홍경모가 썼다. 윤경교는 자는 양일(養一), 호는 장호(長湖)이다. 대사간을 지낸 윤황(尹煌)의 맛 증손자으로 넷째 할아버지인 윤선거(尹宣擧, 백의정승 윤증의 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효종8년(1657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현종4년(166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허적(許積)을 탄핵하였다가 갑산에 유배되었다. 숙종7년(1681년) 공청도관찰사를 지냈다. 성품이 강직하고 박학다식하였다. 저서로는 『장호봉사(長湖封事)』 2책이 있다.
파평윤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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