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부산-대구/명승, 사적

창녕 화왕산성(사적64호)

천지연미소바위 2011. 11. 22. 18:52

창녕 읍내의 동쪽 화왕산에 돌로 쌓은 산성이다. 처음 쌓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 이전으로 보이며, 가야의 산성으로 생각된다. 험준한 북쪽의 바위산을 등지고 남쪽 봉우리 사이의 넓은 부분을 둘러싼 산성으로 둘레가 2,600m이다. 창녕은 낙동강 중류에 넓게 펼쳐진 곡창지대의 중심지이며 서부 경남 지방에 대한 교통·군사상의 요충지로, 이 산성이 당시 매우 중요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현재 동문·서문·연못이 남아있다. 조선 세종 때 성으로서의 기능을 잃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중요성이 인식되어, 곽재우가 의병 근거지로 왜병의 진출을 막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한두 차례 수리가 되어 지금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창령을 보호하는 진산으로 기록된 사실과, 영산·현풍을 포용하는 성이라는 점에서 군사적인 의미가 매우 큰 요충지였다. ※(화왕산성 → 창녕 화왕산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가야< 伽倻 >의 영토였던 창녕< 昌寧 >땅이 신라< 新羅 >에 병합된 뒤 이곳을 비자화군< 比自火郡 >또는 비사벌< 比斯伐 >이라 일컬었으며, 영토 확장에 힘쓴 진흥왕< 眞興王 >(540∼576, 재위)은 이 지방에 척경비< 拓境碑 >(국보 제33호)를 세우는 한편 하주< 下州 >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 주변의 고분군과 함께 이 산성이 당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산성 입구인 서문< 西門 >은 흔적이 없고, 동문< 東門 >은 석축이 무너졌으나, 좌우 석벽은 그대로 남아 있다. 기록에는 이 석성의 둘레가 2,600m였고, 경내에 9개의 우물과 3개의 연못, 그리고 군창< 軍倉 >이 있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 世宗實錄地理志 >』,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 >』에 보면 조선< 朝鮮 >성종< 成宗 >때 이미 폐성< 廢城 >이 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임진왜란< 壬辰倭亂 >이 일어나자 다시 요새가 되어 선조< 宣祖 >30년(1597) 홍의장군< 紅衣將軍 >곽재우< 郭再祐 >가 이 산성을 지키며 내성을 쌓았다고 한다.(출처 : 문화재청)

 

 

  창녕 화왕산은 봄에는 진달래, 가을에는 억새가 장관을 이뤄 등산객이 많은 산. 화왕산 정상에는 화왕산성과 경상남도 기념물246호인 창녕조씨 득성설화지가 있다. 화왕산 억새불꽃축제는 3년마다 열렸는데 2009년 정월 대보름 억새불꽃축제시 인명피해가 있어 그 후로는 축제는 없어졌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산의 이름이 불이 왕성한 화왕산이라 불이 강해 그런 피해가 있었다나...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3,00640000,38&queryText=((V_KDCD=13))%20<and>(((V_NO%20>=64)<and>(V_NO%20<=%2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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