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대전 736

공주 이귀의 묘(충청남도 기념물 제183호)

전에 이귀의 신도비는 보았는데 묘는 처음이다. 이귀는 정몽주 선생과 관련이 있다.(용인 정몽주선생 묘(경기도 기념물1호) (tistory.com)) 마을 가운데 도로로 올라 간다. 직진으로 간다. 왼쪽으로 간다. 오른쪽 산으로 올라 간다. 는 매장형태는 부인 인동장씨와 합장묘이고, 분묘의 수량은 단분(單墳)이며, 봉분의 외형은 원분(圓墳)이다. 봉분에는 타원 모양의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장대석으로 호석을 둘렀으며 묘역은 계체석(階砌石)으로 계절과 배계절로 나뉘어 있다. 계절에는 묘소와 묘표석, 혼유석, 상석이 있고, 배계절에는 상석 바로 앞 좌우에 동자상 1쌍이 있다. 향로석 및 좌우에 1쌍의 문인석과 망주석이 있다. 는 조성형태가 조성당시의 정형성을 보여 주고 있고, 석물도 조성시기가 분명하여 시대 ..

연평부원군신도비(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9호)

다시가 본 연평부원군 이귀 신도비 (공주 연평부원군 신도비(충청남도 유형문화재89호) (tistory.com))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놓은 비를 말한다.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귀(1557∼1633) 선생을 기리고 있다. 이귀는 이이·성혼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군인을 모집하여 나라를 구하는데 힘썼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오르게 하는 인조반정때 공을 세워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그후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한돌로 이루어진 비몸과 머릿돌을 세웠다. 거북받침돌은 머리를 수평으로 내밀고 있으며,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과 구름을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나타내었다. 비문은 조익이 글을 짓고, 오준이 글씨를 썼으며..

숭선군묘(충청남도 기념물 제6호)

다시 찾아가본 숭선군 묘.(공주 숭선군 묘(충청남도 기념물6호) (tistory.com)) 공주 오룡리귀부에서 바라 본 숭선군 묘(사진 중앙 위에 있다) 주차 시설도 생겼다. 묘는 하우스와 건물 사이로 올라간다. 진입로도 새 단장되었다.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의 다섯째 아들 숭선군의 묘소이다. 군의 이름은 징(徵)이며, 시호는 효경(孝敬)이다.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를 따라 공주(公州)로 잠시 피신한 일이 있었는데, 궁으로 돌아와서도 항상 공주를 그리워하더니 숙종 16년(1690) 세상을 떠날 때 공주에 묻어 줄 것을 유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왕족의 무덤은 도성(都城)에서 90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법 때문에 중단되었고 그 후 후손에 의해 다시 이곳으로 옮겨져 만들어..

공주오룡리귀부(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

다시 찾아가본 공주 오룡리 귀부(공주 오룡리귀부(충청남도 유형문화재61호) (tistory.com)) 사진 중앙 위에 숭선군 묘가 보인다. 귀부는 비받침부분을 일컫는 말로, 대개 거북 모양을 띠고 있다. 이 귀부는 조선 제 16대 임금인 인조의 아들 숭선군의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가까이에 세우는 비)를 세우기 위해 만든 것이나 비를 세우지 못하고 중단되어 귀부만 남은 것이다. 숭선군은 이름은 징(徵)이고, 인조의 다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인 조씨(趙氏)이다. 효종 2년(1651) 누이인 효명옹주의 시할아버지 김자점의 역모에 관계되었다 하여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효종 7년(1656)에 석방되어 벼슬과 지위를 되돌려 받았다. 귀부는 네모난 바닥돌과 큼직한 한돌로 만들었다..

영동 신항리 상여(충청북도 민속문화재 제10호)

율리교차로에서 용산면사무소 방향으로 가는 중이다. 구촌교를 지나 오른쪽에 상여가 있다. 건물이 서향으로 지는 해를 받게 되어 있어 문화재 휀손이 우려된다. 이용강 대감의 장례 때 시신을 묘소까지 운반하기 위해 제작된 기구이다. 이용강은 조선 고종 때 경상감사와 공조판서를 지낸 분으로, 영동 황간으로 낙향하여 노년을 지내었다 한다. 상여는 세도있는 양반가의 것으로서, 민간층에서 사용하는 상여와는 다르게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긴 멜대를 중심으로 한 기본틀 위에 관을 싣는 몸체를 올리고 맨 위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한 천을 넓게 드리웠다. 몸체의 아래 위에는 난간을 두르고 검은 천을 덮은 뒤 색띠와 술을 늘어뜨렸다. 윗 난간에는 동방삭(삼천갑자년을 살았다는 전설 속의 인물)으로 보이는 인물상을 여러 개..

영동 송시열 유허비(충청북도 기념물 제46호)

유허비란 한 인물의 행적을 기리고, 그의 옛 자치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워두는 비로, 이 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송시열 선생을 기리고 있다.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은 조선의 대유학자로, 그의 유학사상은 이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 인조 대부터 숙종 대에 이르는 4대에 걸친 노론의 대표로서 정계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며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내었다. 선생이 서재를 짓고 강학하였던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 비는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비몸 앞면에 ‘우암송선생유허비’라 새겨 놓았다. 조선 고종 12년(1875) 선생의 후손과 유림들이 비를 세웠다.(출처 : 문화재청) 옥천에도 옥천 송시열 유허비(충청북도 기념물 제45호) (t..

영동 한천정사(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28호)

우암 송시열(1607∼1689) 이 학문을 연구하며 지내던 집이다. 후에 우암의 제사를 모시는 한천서원을 세웠었는데, 고종 5년(1868)에 서원을 철거하였고 후에 후학들이 다시 지은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중앙에 대청마루가 있고 양쪽 끝에 온돌방을 두었다. 주변에 담장을 두르고 앞면에 문을 두었는데 앞면 양측에 은행나무가 있다.(출처 : 문화재청) 지금은 은행나무가 없어요.

옥천 송시열 유허비(충청북도 기념물 제45호)

옥천 이원면 구룡리 마을회관 근처에 주차한다. 유허비 비각 지붕이 보인다. 유허비란 한 인물의 행적을 기리고, 그의 옛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송시열 선생을 기리고 있다.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은 옥천 지방에서 출생한 조선의 대유학자이다. 그의 유학사상은 이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조선 인조 대 부터 숙종 대에 이르는 4대에 걸친 노론의 대표로서 정계에서 크게 활약하였고,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내기도 하였다. 비는 현재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으며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로 직사각형 비몸을 올리고 지붕 모양의 머릿돌을 갖춘 모습이다. 비몸 앞면에는 ‘우암송선생유허’라는 비명칭을 해서체로 새겨 놓았고, 뒷면에는..

성주사지석등(충청남도 유형문화재33호)

보령 성주사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화재가 있다. 보령 성주사지(사적307호)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국보8호)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보물19호) 보령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보물20호)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보물47호)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보물2021호) 성주사지석등(충청남도 유형문화재33호) 성주사지석계단(충청남도 문화재자료140호) 보령성주사지석불입상(충청남도 문화재자료373호) ◦ 통일신라 말기 성주사 창건시기에 세워진 신라양식의 석등으로 알려져 있음. ◦ 지붕돌에 비해 등불을 두는 화사석과 받침기둥이 가늘게 만들어 졌으며, 팔각형 지붕돌의 상륜부가 파손되었으며, 높이는 220cm이고 화강암으로 되었으며, 파괴되었던 것을 수습하여 지금에 이름.(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