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부산-대구/국보,보물 105

상주 복용동 석조여래좌상(보물119호)

왕산 정상인 장원봉 상주 왕산역사공원내에 있는 백우정. 채색이 틋이하네여. 석불이 위치한 곳은 상주의 명산으로 알려진 왕산의 동쪽 중간쯤이다. 이 석조여래좌상이 위치해 있던 곳은 상주시 복룡동 358번지였으나, 1975년 10월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콧날이 약간 손상된 얼굴은 둥글고 풍만한데, 가늘게 뜬 눈, 작고 도톰한 입술 등에서 인간적이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어깨는 현저히 좁아졌고, 오른손은 없어졌지만 두 손이 아래위로 겹쳐진 모습으로 보아,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손모양으로 생각된다. 몸 전체를 두껍게 감싼 옷은 양 어깨에서 부채꼴 모양을 이루며 좌우로 대칭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의 표현은 부드러우면서도 형식적으로 처리된 모습이다. 이 불상은 전반적..

상주향교 대성전‧동무‧서무(보물)

동무 서무 2020.12.28에 보물로 되었는디 아직도 유형문화재라고 그대로 있네여. 상주향교」는 조선시대 향교의 기능에 따른 건물과 배치구성, 지방행정체계에 대한 설위형식이 지역별로 시기적 변화양상이 있었음을 밝힐 중요한 건축사적 특성을 가진 건물임. 동무․서무는 건축 연혁이 명확하고 조선중기에 중창된 뒤 위치의 변경이 없으며, 대체적으로 당시의 구조양식 등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음. 특히 정형화되고 엄격한 배치구성이 돋보이며, 문묘 다음으로 큰 규모이며, 경사 지형을 고려한 탁월한 입면구성을 갖추고 있음.(출처 : 문화재청)

이종주 고신왕지 및 이임 무과홍패(보물 제1006호)

이종주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2점의 왕지이다. 이종주는 조선 전기 지방관을 지냈다. 「이종주통정대부지울주사왕지」는 정종 1년(1399) 1월 26일에 이종주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사령왕지이다. 이 사령왕지는 총 4행으로 초서체로 쓰여졌고, 년월 위에 ‘조선왕보’라고 도장이 찍혀 있다. 이 문서는 조선 전기의 관제 및 인사행정의 변천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이임무과급제왕지」는 세종 17년(1435)에 이종주의 손자 이임에게 발급된 무과급제를 인정하는 홍패왕지이다. 총 5행에 걸쳐 초서체로 쓰여졌고, 년월 위에 ‘국왕신보’라고 도장이 찍혀있다. 조선 전기 관제 및 과거제도 연구와 새보(璽寶:임금의 도장)사용의 변천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울산 태화사지 십이지상 사리탑(보물 제441호)

처음에는 사리탑이 깨끗하여 모조품으로 착각했다. 해설사에게 확인 결과 진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시가서 사진을 더 촬영했다. 태화사터에 묻혀 있던 것을 1962년에 발굴하여 일시적으로 부산으로 옮겼다가, 다시 울산의 학성공원으로 옮겨와 보존하고 있었다. 2011년 현재는 울산박물관으로 이전하여 보존하고 있다. 태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던 시기에 없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남아있는 유물로는 이 사리탑이 유일하다. 일반적인 사리탑들과는 달리 널따란 바닥돌 위에 종 모양의 몸돌이 놓인 간단한 구조로, 바닥돌에는 앞면과 옆면에 가느다란 안상(眼象)이 움푹하게 새겨져 있다. 종 모양을 하고 있는 몸돌은 윗부분에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 ..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

울산암각화박물관 건너서 암각화 가기전에 있는 천천리각석 가는 안내판. 여기서 걸어 가기는 멀다. 울산대곡박물관쪽으로 갔다. 울산대곡박물관은 좌회전, 천천리 각석은 직진하여 장천교를 건넌다. 멀리 두동면은 좌회전, 천천리각석은 직진하라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 근처 적당한 곳에 주차 하기를 권해본다. 본인은 차량 통행이 없어 안내소 앞까지 가서 주차했다. 천천리각석은 우측으로 가고 천천리 공룡 발자국 화석은 직진한다. 뒤 돌아본 모습이다. 본인이 갔을 때는 길이 약간 물에 잠겼다. 관람객을 위해 길을 보수해야... 왼쪽으로 내려간다. 천천리 각석은 계단 내려가자마자 왼편에 있다. 비 바람에 침식작용이 걱정된다. 천천리 각석 개울 건너에 천천리 공룡 발자국 화석이 있다. 왼쪽이 천천리 공룡 발자국화석, 오른쪽..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

월요일에 갔기에 울산암각화박물관은 들어가보지 못했다. 대신 여기에 주차를 하고 암각화까지 걸어갔다. 가면서 여유있게 여러가지 구경을 했고 코로나19로 인해 관람객이 거의 없어 한적했다. 가면서 다음과 같이 구경을 하였는데 왕복 1시간 남짓 걸린것 같았다. 이 주변 볼거리를 다음 순서대로 찾아갔다. 1. 암각화박물관(http://blog.daum.net/dbsqkqh/5803) 2. 집청정(http://blog.daum.net/dbsqkqh/5804) 3. 반구대(http://blog.daum.net/dbsqkqh/5805 4. 반구서원, 모은정(http://blog.daum.net/dbsqkqh/5806) 5. 반고서원 유허비(http://blog.daum.net/dbsqkqh/5807) 6. 연로개수기..

울주 망해사지 승탑(보물 제173호)

울주 망해사지 승탑은 망해사 북측에 있다. 승탑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 이 2기의 승탑은 망해사의 법당 북쪽에 동·서로 자리하고 있는데, 동쪽 승탑은 파손되어 있던 것을 1960년 11월 복원한 바 있다. 서로 규모와 양식이 같으며, 각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탑신(塔身)을 받치는 기단(基壇)은 3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받침돌은 8각으로 구성하고, 그 위로 연꽃무늬를 조각한 돌을 올렸으며, 가운데받침돌은 높은 8각의 단 위에 다시 낮은 3단이 층을 이뤄 받치고 있다. 윗받침돌은 옆면에 16잎의 연꽃잎을 이중으로 조각하였는데 그 모양이 화사하다. 탑신은 각 면마다 창의 형태를 새겼고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으며, 4면에는 문짝 모양을 새..

울주 청송사지 삼층석탑(보물 제382호)

찾아 가기가 쉽다. 주변에 작은 주차장도 있다. 문화재청에 '청량읍 율리 1420'되어 있는데 이번지는 도로로 넓다. 차라리 근처인 '청량읍 율리 1198-1'로 찾아가기를 권해본다. 남암산 아래에 있는 청송사 절터에 있는 삼층석탑이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은 각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기고, 마감돌 위에 다른 돌로 2단의 모난 괴임돌을 끼워서 각각 윗돌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이 특히 길고 크며, 2층 몸돌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각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이 있고, 추녀가 두꺼워 지붕 네 귀퉁이의 치켜올림이 약하며 처마는 수평으로 길이가 짧다...

통영 세병관(국보 제305호)

통영 세병관은 통영 삼도수군통제영(사적 제402호, http://blog.daum.net/dbsqkqh/5769)안에 있는데 참조하면 된다. 세병관은 1963년 10월 24일 해체수리시 종도리의 홈 속에서 발견된 세병관중수상량문에 을사년(서기 1605년) 1월에 짓기 시작하여 그해 가을 7월14일에 상량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통제영의 중심건물이다. 이 건물은 창건 후 약 290년 동안 3도(경상·전라·충청도) 수군을 총 지휘했던 곳으로 그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치긴 했지만 아직도 멀리 남해를 바라보며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앞면 9칸·옆면 5칸 규모의 웅장한 건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건물 내부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중앙 뒷면에 약 45㎝ 정도 높..

경주 이언적 수고본 일괄(보물 제586호)

경주 독락당(보물 제413호, http://blog.daum.net/dbsqkqh/5758) 참조 보물사진 출처 : 문화재청 보물 제586-1호 이언적 수고본 일괄 – 속대학혹문 이언적 수고본 일괄-속대학혹문(李彦迪 手稿本 一括-續大學或問)은 조선 중종 때의 유학자이며 정치가인 회재 이언적(1491∼1553)이 명종 2년(1547)에서 명종 8년(1553) 사이에 직접 쓴 저술 가운데 하나이다. 회재 이언적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김안로를 등용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귀양을 가기도 했으며, 김안로 일파가 몰락한 뒤 다시 정치에 나섰고, 후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서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1547년 조작된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제로 유배되었고,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