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문화재, 세계기록유산/성남 장서각 신축 개관전

손소초상(보물1216호)

천지연미소바위 2011. 12. 8. 20:27

손소(1433∼1484)선생을 그린 초상화이다. 손소 선생은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해 적개공신에 오르고 후에 안동부사와 진주목사를 거쳤다. 초상화의 크기는 가로 105㎝, 세로 160㎝이며 비단 위에 채색하였다. 오른쪽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머리에는 사모를 쓰고 관복을 입고 있다. 갈색선으로 이목구비를 표시했고 흰색의 속옷 소매가 보인다. 왼쪽 다리부분의 안감과 녹색의 속옷이 보이며 의복선은 각지게 처리했다. 흰 가죽신을 신고 있는 모습이다. 안타깝게도 오랫동안 방치되어 떨어져나간 부분이 많지만, 그림의 색체나 윤곽 그리고 글은 비교적 뚜렷하다. 이 손소 초상화는 적개공신 때의 모습을 10년 후인 성종 7년(1476)에 그린 것으로 조선 초기 공신도상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품이며, 당시의 화법을 보여주고 있어 그 의의가 더욱 큰 작품이다. 손소(1433∼1484) 선생은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무인(武人)으로서, 자(字)는 일장(日章), 시호(諡號)는 양민(襄敏)이다. 세조(世祖) 9년(1463)에 문예시(文藝試)에 장원(壯元), 성균주부(成均主簿), 병조좌랑(兵曹佐郎)을 지내고 세조 13년(1467) 이시애(李施愛)의 난(亂)때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 강순(康純)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출정(出征), 난이 평정된 뒤 적개공신(敵愾功臣)이 되어 내섬시정(內贍寺正)에 특진했다. 그후 성주목사(星州牧使), 공조참의(工曹參議)를 거쳐 계천군(溪川君)에 봉해지고, 안동부사(安東府使), 진주목사(晋州牧使) 등을 역임했다. 『양민공신유사(襄敏功臣遺事)』에 의하면 공의 나이 44세에 "상명충훈부도화제공신영상(上命忠勳府圖畵諸功臣影像) 사급장우본가(賜給藏于本家)"라 하였으니, 적개공신상이 그려진 것은 공신호(功臣號) 책록(冊錄) 후 10년이 경과한 성종(成宗) 8년(1477)이 된다. 현재 전해오는 손소영정은 바로 이 적개공신상으로 믿어진다. 오사모(烏紗帽)에 야청색포(鴉靑色袍)를 입고, 공수(拱手)자세를 취한 전신좌상(全身坐像)으로서 안면(顔面)은 좌안7분면(左顔七分面)이며 몸체는 8분면을 취하고 있다. 중폭(中幅)을 대폭으로 하고, 좌우 양쪽을 결봉(結縫)한 형식, 아무 것도 깔려있지 않는 바닥, 각지게 처리한 의복의 외곽선(外廓線), 선염기(渲染氣)가 전혀 삽입되지 않고 갈색선으로 이목구비(耳目口鼻)만을 표시한 점 등은 조선 초기의 초상화법(肖像畵法)을 여실히 예시한다. 진본(眞本)이 수폭밖에 전해오지 않는 현재, 손소영정은 조선 초기 공신도상을 대표하는 가품(佳品)이다.(출처 : 문화재청)

 

 

 

 

 

 

적개공신논상록권(경상북도 유형문화재13호,  http://blog.daum.net/dbsqkqh/847)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12160000,31&queryText=((V_KDCD=12))%20<and>(((V_NO%20>=1216)<and>(V_NO%20<=%20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