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비란 죽은 사람의 생전의 행적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우는 비이다. 조선시대에는 정2품이상의 관직에 있는 사람 중 위업을 세웠거나 학문이 뛰어나 후세에 모범이 될 때에 신도비를 세워 기리도록 하였다 한다. 이 비는 조선시대의 문신 윤효손의 신도비이다. 윤효손(1431∼1503)은 단종 원년(1453)에 과거에 급제하여 황해도관찰사, 형조판서, 우참찬 등을 두루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다. 성종때에는『경국대전』과『오례의주』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연산군 9년(1503)에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거북받침돌은 앞발의 형태가 특이한데, 보통 머리쪽을 향하고 있는 것에 비해 이 앞발은 뒤로 구부려 발톱을 아래의 연꽃받침에 붙이고 있다. 머릿돌에 새겨진 용의 조각은 사실성이 뛰어나며, 꼭대기에는 둥근 돌을 얹어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비문에는 윤효손의 평생업적과 자손들의 계보 및 그의 충효와 인품을 기리는 글들이 적혀 있다. 조선 중종 14년(1519)에 세워진 비이다. 비문은 신용개가 짓고, 신공제가 글씨를 썼는데, 글씨는 고려시대에 비해 필력이 떨어진다. 이 비는 조선시대(朝鮮時代) 문신(文臣)인 윤효손(尹孝孫)(1431∼1503)의 신도비이다. 윤효손의 자(字)는 유경(有慶), 호(號)는 추계(楸溪), 본관(本貫)은 남원(南原)이다. 그는 단종(端宗) 원년(元年)(1453)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예조정랑(禮曹正朗), 호조(戶曹)·예조참의(禮曹參議),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 경상도(慶尙道) 양전순찰사(量田巡察使), 한성부(漢城府) 좌윤(佐尹), 형조판서(刑曹判書),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성종(成宗) 원년(元年)(1470)에 『경국대전(經國大典)』, 『오례의주(五禮儀註)』를 수찬(修撰)하였고, 뒤에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연산군(燕山君) 9년(1503)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중종(中宗) 14년(1519)에 세워진 이 신도비(神道碑)는 선명(鮮明)한 운룡문(雲龍紋)이 조각(彫刻)된 1.2m 높이의 장방형(長方形) 지대석(地臺石) 위에 한돌로 앙련대좌(仰蓮臺座)와 귀부(龜跌)를 만들어 얹었다. 귀부 위에 비신을 세우고 상부 이수(이首)에는 반룡(蟠龍)을 조각했으며 정상(頂上)에는 노반(露盤) 위에 보주(寶珠)를 얹었다. 이 비는 조선(朝鮮) 전기(前期)의 석비를 대표할 만한 수작(秀作)으로 전체 높이는 5.27m이다.(출처 : 문화재청)
구례 윤문효공 신도비(보물584호)는 윤문효 묘앞에 있는데 다음지도에는 엉뚱한 곳에 표시 되어있네요.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5840000,36&queryText=((V_KDCD=12)) <and>(((V_NO >=584)<and>(V_NO <= 584)))
'*전라-광주 > 국보,보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례 화엄사 서 오층석탑(보물133호) (0) | 2012.07.03 |
---|---|
구례 화엄사 동 오층석탑(보물132호) (0) | 2012.07.03 |
구례 천은사 금동불감(보물1546호) (0) | 2012.07.03 |
구례 천은사 괘불탱(보물1340호) (0) | 2012.07.03 |
남원 실상사약수암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421호) (0) | 2012.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