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대전/유형문화재,기념물

공주 마곡사 심검당(충청남도 유형문화재135호)

천지연미소바위 2012. 10. 11. 20:42

   마곡사는 충남지방의 모든 사찰을 통괄했던 큰 사찰로 신라 때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고려시대 보조국사가 재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세조(재위 1455∼1468)가 이곳에 와서 `영산전´이라는 편액을 직접 써서 내렸고 잡역을 면제하는 교지를 내렸는데 모두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없어졌다. 효종 1년(1650)년부터 주지스님인 주순의 노력으로 절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는데, 정조 6년(1782)년에 다시 큰 불이 일어나 대광보전을 비롯한 1,050칸이 모두 불에 탔다. 마곡사 심검당은 대광보전 5층 석탑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스님들의 거처인 요사채이며, 고방은 창고건물이다. 심검당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조 21년(1797)년에 보수공사가 이루어진 기록과 편액에 적힌 글에 의하면 철종 7년(1856)년에 고치고 1909년에 기와를 다시 올렸다고 한다. ㄷ자 평면에 자연석을 쌓아 1층의 기단을 형성하고 주춧돌을 놓은 위에 둥글고 네모난 기둥을 혼합하여 세웠다. 고방은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의 남향집이다. 마곡사 대광보전(大光寶殿) 5층 석탑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요사채와 그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창고건물이다. 심검당은 'ㄷ'자 평면에 자연석을 쌓아 한벌의 기단(基壇)을 조성하고 덤벙 주초석을 놓은 위에 둥글고 네모난 기둥을 혼합하여 세웠다. 공포(拱包)는 간결한 양봉(양奉)만 결구되어 있는 납도리 계통의 접으로 내부에는 우물천장이 가설되어 있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정면 6칸, 측면 4칸의 동향한 본채에서 북단 4칸, 남단 2칸을 동쪽으로 5칸씩 달아낸 형태이다. 또 남쪽 중간에는 사방 2칸을 달아내어 방과 마루를 들여 요사(寮舍)로 쓰고 있다. 고방(庫房)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남향집이다. 마곡사는 30본산의 하나로, 충남지방의 모든 사찰을 통괄했던 대찰이었으나 여러 번 화재를 입어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철종 2년(1815)에 작성된 태화산(泰華山) 마곡사사적입안(麻谷寺事蹟立案)에 의하면 신라때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여 고려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재건하였다고 적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이곳에 와서 영산전(靈山殿)이라는 편액(篇額)을 직접 써서 내렸고 잡역을 면제하는 교지를 내렸으나 모두 임진왜란때 불이 나서 불타 없어졌다. 효종 원년(1650)부터 10년간 주순(주淳) 주지의 노력으로 사원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는데 정조 6년(1782)에 다시 큰불이 일어나 대법당 대광보전을 비롯한 1,050칸이 불탔다. 이 때 영산전과 대웅전은 화를 면하였다. 현재 마곡사에 있는 건물은 모두 1782년 이후에 재건된 건물들인데 부속건물들의 재건 연대에 대해서는 사적입안에 잘 기록되어 있다. 심검당(尋劍堂)은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정조 21년(1797)년에 중수된 기록이 사적입안(事蹟立案)에 나오고 전내(殿內)의 편액(篇額) 명문에 의하면 함풍(咸豊) 6년(1856)년에 중수하고 3년(1909)에 기와를 다시 올린 기록이 남아 있다. 마곡사에는 대웅보전(大雄寶殿)(보물 제 801호), 대광보전(大光寶殿)(보물 제 802호), 영산전(靈山殿)(보물 제 800호)을 비롯하여 많은 건물과 탱화, 전적, 판본들이 남아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마곡사 심검당인데 뒤에 있는 고방과 함께 충청남도 유형문화재135호이다.

 

 

 

 

심검당 현판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1,01350000,34&queryText=((V_KDCD=21)) <and>(((V_NO >=135)<and>(V_NO <= 135)))&maxDocs=15000&docStart=1&docPage=10&canasse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