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대전/유형문화재,기념물

공주 영규대사묘(충청남도 기념물15호)

천지연미소바위 2012. 11. 9. 16:00

  승병장인 영규대사의 묘소로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계룡산의 갑사(甲寺) 진입로를 조금 지나 서쪽편에 위치한다. 영규대사는 밀양 박씨로 호는 기허(騎虛)이며,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제자이다. 계룡산 갑사 청련암에서 수도하면서 무예를 익혔는데 그 재능을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한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3일 동안 통곡하고 스스로 승병장이 되었다 한다. 승병 1천명을 모집하여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청주성 전투와 금산 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의주까지 피난을 갔던 선조는 승전소식을 듣고 영규대사에게 벼슬과 옷을 하사하였는데, 하사한 선물이 도착하기도 전에 금산 전투에서 숨을 거두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승병이 일어난 것은 그가 최초로 전국 곳곳에서 승병이 일어나는 도화선이 되었다. 영규대사는 부상한 몸을 이끌고 현재의 묘소부근까지 와서 숨을 거두었다 한다. 해발 150m의 산록 경사면을 깎아 만든 묘소는 최근에 봉분, 축대, 계단 등의 시설을 보수공사 하였다. 묘비는 순조 10년(1810)에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영규대사의 성(姓)은 박(朴)으로 본관(本貫)은 밀양(密陽)이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제자로 원래 공주(公州) 갑사(甲寺)의 청련암(靑蓮庵)에서 수도하다 조선(朝鮮) 선조(宣祖) 25년(1592)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승병(僧兵)을 모집하여 조헌(趙憲)의 의병(義兵)과 함께 최후까지 싸우다 부상한 몸으로, 현재 대사의 정려비각(旌閭碑閣)이 있는 곳까지 와서 숨을 거두게 되매, 갑사(甲寺)의 승려들이 이곳에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무덤에 세운 묘비(墓碑)는 순조(純祖) 10년(1810)에 방계(傍系)의 후손들이 세웠다.(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에 보면 영규대사묘의 위치가 갑사 진입로 조금 지나 서쪽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오히려 계룡면소재지 남서쪽에 있습니다. 또 숨을 거둔 장소 설명이 서로 다르네요. 문화재청에 민원했네요.

 

 

답변내용] :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영규대사묘에 깊은 관심을 가져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먼저 안내문안에 오류가 있어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사과를 드리며, 선생님이 지적하신 부분에 대하여 혼란이 없도록 수정 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아울러 영규대사묘 안내판에 대하여는 올 상반기 안에 수정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한번 혼란과 불편을 드린 점에 대해 사과드리며, 앞으로도 우리시의 문화유산에 많은 애정과 관삼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오류를 수정하였다는데 아직도 영규대사묘가 갑사 진입로 조금지나 있다고 되어 있네요.

 

 

현장 안내판 글씨가 많이 훼손되었네요.

 

 

게룡면사무소 앞에서 논산방향으로 550여m를 가다보면 영규대사묘는 오른쪽으로 가라는 안내판이 있다.

 

 

왼쪽 기와집이 윤전 사우이고 영규대사묘는 그 오른쪽 숲 속에 있다.

 

 

홍살문 위로 조금만 올라가면 왼쪽에 영규대사묘가 있다.

 

 

왼쪽 밝게 보이는 곳에 영규대사묘가 있다.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3,00150000,34&queryText=(`영규`)<in>z_title&maxDocs=15000&docStart=1&docPage=10&canasse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