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광주/문화재자료,등록문화재

순천 옥계서원(전라남도 문화재자료5호)

천지연미소바위 2011. 5. 18. 11:28

경주 정씨 노송정 정지년을 중심으로 하여 옥계 정승복, 그의 아들 성은 정사준, 매헌 정사횡, 손자 정소빈, 정소선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서원이다. 정지년은 세종 20년(1438)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관직을 버리고 유교경전을 연구한 사람이다. 이 서원은 순조 21년(1821)에 성의 남쪽 장천리에 세웠다고 『순천속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 뒤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된 뒤 1953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웠다. 외삼문인 태화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경모재가 있고 왼편에 고직사, 오른편에 강당인 옥계원, 그 뒤편에 내삼문인 세충문과 사당인 옥계사가 있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1칸 반 규모로 앞면 반칸은 툇마루를 깔아 개방하고, 안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강당은 앞면 3칸·옆면 1칸 반 건물로 앞면에 툇마루를 깔고 가운데칸을 대청으로 하였으며 왼쪽·오른쪽칸에는 온돌을 깔았다. 옥계서원은 순조 21년(1821)에 성의 남쪽 장천리에 세웠다고 『순천속지』(1881년)에 기록되어 있다. 그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당한 뒤 1953년 현 위치로 옮겨 다시 세웠다. 현재 이 서원에는 경주정씨 노송정 정지년을 주벽으로하여 임란공신 옥계 정승복, 그의 아들 성은 정사준, 매헌 정사횡, 손자 곡구 정소빈, 정소선 등 6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춘추로 제향하고 있다. 정지년은 세종 20년(1438)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하위지·성삼문 등과 교유하였으며 예문관 삼사 등을 거치면서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관직을 사직, 산수를 벗삼아 유교 경전을 강구하였던 사람이다. 정승복은 노송정의 현손으로 명종 7년(1552)에 옥구현감이 되어 도원사 이준경과 함께 왜구를 소탕하였으며, 어란진 첨사가 되어 추자도에서 왜적과 싸워 대승하기도 하였다. 을사사화로 말미암아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 현 순천시 옥천동으로 퇴거 스스로 장계거사라 칭하고 산수를 벗삼아 학문을 강구하였다. 그의 아들 정사준과 정사횡, 손자 정소빈, 정소선은 임난·정유왜란때 모두 공을 세웠던 인물들이다. 옥계서원은 서남쪽으로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갖는 대지위에 있다. 외삼문인 태화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경모재가 있고, 왼편에 고직사, 오른편에 옥계서원의 강당인 옥계원, 그 뒷편에 내삼문인 세충문, 신실인 옥계사 등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규모로 전면 반칸을 툇문으로 개방하고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낮은 막돌 허튼층 쌓기한 기단 위에 덩벙 주춧돌을 놓고 툇간 부분은 민홀림의 원형기둥을, 나머지 부분에는 사각기둥을 세웠다. 둥근서까래만 걸어서 한식기와 잇기한 맞배지붕을 받게 하였으며, 지붕박공면에는 바람막이 판을 달았다. 기둥과 기둥사이는 창방으로 결구하였으며, 공포는 짜올리지 않고 사각형으로 치목(治木)한 창방(昌枋)뺄목과 원형 보뺄목을 주두위에 차례로 얹었으며, 도리는 납도리를 걸었다.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건물로서 전면 툇간에 툇마루를 깔고 중앙칸을 대청으로 하였으며, 좌·우측칸은 온돌을 깔았다.(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31,00050000,36&queryText=((V_KDCD=31)) <and>(((V_NO >=5)<and>(V_NO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