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광주/명승, 사적

해남 윤선도 유적(사적432호)1

천지연미소바위 2013. 8. 28. 22:08

  일반적으로 사적432호인 해남 윤선도 유적을 '해남읍 연동리 82'에 있는 고산 윤선도 유적지{(해남윤씨 녹우당 일원(사적167호, http://blog.daum.net/dbsqkqh/4405)}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해남 윤선도 유적은 현산면 구시리에 있다.

 

 

  지도에서 6 : 고산신도비, 7번 : 고산묘소, 8 : 고산제각이다. 본인은 3번위치에 주차하고 5번-6번(신도비)-7번(고산묘소)-9번-8번(고산제각)을 보고 다시 주차 장소까지 오는데 약 6km에 2시간 30분쯤 소요된것 같다. 화살표 방향 따라 다녀왔다. 현산고성은 9번에서 좀더 올라가면 있는 듯하다. 본인은 포기하고 내려왔다.

 

 

 

해남읍에서 806번 도로를 타고 삼산면 방향으로 만안리까지 간다.

 

 

만안리에서 우회전하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위에 있는 다음지도에서 1번 위치이다.

 

 

 

멀리 보이는 언덕길을 넘는다.

 

 

 

막다른 길에서 우회전한다. 다음지도에서 2번 위치이다.

 

 

 

자동차는 더이상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여기부터 걸어서 간다. 다음지도에서 3번 위치이다.

 

 

 

안내판이 있다. 다음지도에서 4번 위치이다. 우측길로 올라간다.

 

 

 

 본인은 오른쪽 중간에 현위치에서 검정선 따라 반시계방향으로 가서 고산신도비-고산묘소-고산제각을 보고 내려왔다. 현산고성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포기했다.

 

 

 

 

가도 가도 끝없는 길이다.

 

 

 

  고산묘소와 신도비는 왼쪽으로 가라는 안내판이 있다. 그런데 고산묘소는 오른쪽으로도 안내되어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서로가 만난다. 다음지도에서 5번 위치이다.

 

 

 

신도비쪽으로 먼저 갔다. 잡초가 우거져 뱀이라도 나올까 무섭다.

 

 

신도비가 보인다. 신도비 좌우는 훼손되어 있다. 다음지도에서 6번 위치이다.

 

 

 

고산 윤선도신도비는 미수 허목선생이 썼다.

  미수 허목 선생 관련 자료

   -연천 미수허목묘역(경기도 기념물184호, http://blog.daum.net/dbsqkqh/4097)

   -춘천 허목초상(보물1509호, http://blog.daum.net/dbsqkqh/3333)

   -용산 허목수고본(보물592-1호, http://blog.daum.net/dbsqkqh/3533)

 

 

 

 

 

 

 

 

  고산 윤선도가 54세때인 인조 18년(1640)에 머무르며 『금쇄동기』(보물 제482-2호)를 비롯한 여러 문헌들을 집필한 곳인 금쇄동과 금쇄동 안에 위치한 현산고성이다. 윤선도는 8살되던 해에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어 해남으로 내려가 살았다. 20세에 승보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1616년 성균관유생으로서 집권세력을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함경도로 유배되었다. 벼슬을 버리고 내려온 후에는 조상이 물려준 엄청난 재산으로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찾은 금쇄동에 여러 정자와 각을 지어놓고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금쇄동은 윤선도가 원림(園林)을 조성한 고성(固城)안과 『금쇄동기』에서 명명한 22개의 지명 등이 있으며, 윤선도가 문학적 영감을 얻기 위해 인위적으로 개척한 문학산책로로서 건물지와 연못지의 유구가 남아 있고, 금쇄동내에 위치한 현산고성(懸山固城)은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동문, 서문, 북문 등 3곳의 문지, 수구의 성곽시설과 망루지, 건물지, 제방 등의 성내시설이 남아 있다. 이곳은 고산 윤선도의 시문학 창작의 산실로서 국문학상의 학술적인 가치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옛성이 잘 남아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큰 유적이다.(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3,04320000,36&flag=Y

 

 

해남 윤선도 유적의 위치 표시는 고산 윤선도 묘소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