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광주/명승, 사적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사적114호)

천지연미소바위 2013. 9. 30. 21:23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충무사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영정

 

 

 

 

 

 

 

 

 

 

 

 

 

 

 

 

 

 

 

관왕묘비

 

 

 

 

 

 

 

 

 

 

이순신장군이 서거 후 유해를 80여일간 임시로 안장 하였던 곳.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과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의 군사들이 힘을 합해 왜군을 물리쳤던 장소이다. 충무공은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내던 때에 왜적의 침입을 대비하여 여수를 중심으로 배를 만들고 군비를 늘리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옥포대첩, 노량해전, 당항포해전, 한산대첩 등 곳곳에서 전승을 거두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명량대첩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죽은 후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올랐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인 선조 31년(1598)에 이순신이 약 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을 쳤고, 그 해 7월에 명나라 장수 진린이 약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금도에 도착하였다. 가까이에 있던 이곳 묘당도에 진을 치면서 두 나라의 군사가 힘을 합하게 되었는데, 이후 7개월간 이곳은 조선과 명나라의 해군 본부가 되었다. 지금 이곳에는 이충무공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충무사가 있고, 보호하는 절의 의미를 띤 옥천사가 나란히 있다. 충무사는 진린이 꿈에 나타난 관운장을 제사지내어 장병들의 무사함을 기원하기 위해 지었다고 하는 관왕묘에서 유래한다. 옥천사는 현종 7년(1666)에 처음 지어졌는데, 관왕묘를 보수공사하면서 그 옆에 수호와 제사를 맡게 하기 위해 암자 하나를 지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관왕상과 위패·각종 유물들이 바다에 던져졌고, 옥천사의 불상만이 가까운 백운사에 옮겨져 보관되었다. 광복 후에는 관왕묘가 있던 자리에 충무사를 짓고 이충무공을 모시게 되었다.

※(묘당도이충무공유적 →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정유재란 때 수군통제사 이순신과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水軍都督 陳璘) 휘하 조·명연합수군이 진을 치고 왜군을 물리쳤던 전적지이다. 1598년(선조(宣祖) 31) 2월 충무공 이순신이 고하도(高下島)로부터 약 8천명의 수군을 인솔해와 현지에 진을 친 다음, 그 해 7월에 명의 원군으로 참전해온 진린도독 또한 약 5천명의 수군을 이끌고 고금도에 당도하여 가까운 묘당도에 진을 침으로써 양군이 연합전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9월 15일 우리 수군부대가 현지를 떠나 전라좌수영 방면으로 군사를 옮길 때까지 약 7개월간에 걸쳐 이곳은 조·명연합수군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이충무공의 조카 이분(李芬)이 쓴 『행록(行錄)』에 의하면, 「고금도(古今島)에 진(陣)을 옮겨오니 군사지리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 군량을 공급하는 것도 편리하여 여러모로 이로움이 컸다. 그리하여 남도의 백성 수만호가 공의 명에 의존하고 있었으니 이때 우리 수군의 위세가 지난날 한산진(閑山陣)에서 보다 열배나 더했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당시 수군의 군세가 크게 떨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묘당도(廟堂島)에는 이충무공을 제향(祭享)하는 충무사가 있고 그 수호사(守護寺) 성격을 띤 옥천사(玉泉寺)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충무사는 1598년 명의 수군이 고금도에 주둔하고 있던 당시 진린도독이 관왕묘(關王廟)를 건립한 데서부터 유래한 것이라 한다. 그의 꿈에 나타난 관운장(關運將)을 제향하여 휘하 장병들의 안녕과 승전을 기원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1684년(숙종(肅宗) 10) 전라도 관찰사 이사명(李師命)이 이 관왕묘를 중수한 뒤 사액(賜額)을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후 1710년(숙종(肅宗) 36) 판부사 이이명(判府使 李이命)의 주청에 의해 비로소 국가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조정으로부터 제관을 보내와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 후 관왕묘는 1781년(정조 (正祖) 5) 왕의 꿈에 현몽한 것을 계기로 하여 정조가 「탄보묘(誕報廟)」란 사액(賜額)을 받게 되었는데, 이충무공과 함께 진린(陳璘)이 배향되어 오던 이곳에 명장(名將) 등자룡(鄧子龍)이 추배(追配)된 것이 바로 이때부터의 일이었다. 그리고 옥천사가 처음 지어진 것은 1666년(현종(顯宗) 7)이었으니 당시 전라우수사 유비연(柳斐然)이 관왕묘 중수(重修)를 위해 자재를 모아 승 천휘(僧 天輝)로 하여금 건물을 보수케 하는 한편 그 곁에 암자 하나를 지어 묘(廟)의 수호와 제사를 맡게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말살정책에 의해 그때까지 보존되었던 관왕상(關王像)과 위패 및 각종 유물들이 모두 바닷물에 던져지고 단지 옥천사의 불상만이 가까운 백운사(白雲寺)에 옮겨져 보관되었다고 전한다. 해방 후 관왕묘가 있던 옛터에 충무사를 건립, 이충무공을 제향하였는데 이때 임란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을 추배(追配)하였다. 1971년 충무사의 신실과 동재·내삼문·비각 등이 이루어진 뒤 1975년에 동재와 외삼문이 신축되었고, 1981년에 다시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다.(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3,01140000,36&fla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