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보,보물

용산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국보104)

천지연미소바위 2011. 6. 2. 18:53

 통일신라 말의 승려 염거화상의 사리탑이다. 염거화상(?∼844)은 도의선사의 제자로, 선(禪)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던 당시 주로 설악산 억성사에 머물며 선을 널리 알리는데 힘썼다. 체징에게 그 맥을 전하여 터전을 마련한 뒤 문성왕 6년(844)에 입적하였다. 이 탑은 원래 강원도 흥법사터에 서 있었다 하나, 이에 대한 확실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탑이름 앞에 ‘전(傳:∼라 전하다)’자를 붙이게 되었고, 원래 위치에서 서울로 옮겨진 후에도 탑골공원 등 여러 곳에 옮겨졌다가 경복궁에 세워졌으나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탑은 아래위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기단(基壇)은 밑돌·가운데돌·윗돌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면마다 소박한 조각이 멋스럽게 펼쳐져 있다. 밑돌에는 사자를 도드라지게 새겼고, 가운데돌에는 움푹 새긴 안상(眼象)안에 향로를 새겨 두었다. 2단으로 마련된 윗돌은 아래단에는 연꽃을 두 줄로 돌려 우아함을 살리고 윗단에는 둥그스름한 안상(眼象) 안에 여러 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사리를 모셔둔 탑신(塔身)의 몸돌은 면마다 문짝모양, 4천왕상(四天王像)을 번갈아 가며 배치하였는데, 입체감을 잘 살려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당시의 목조건축양식을 특히 잘 따르고 있어서 경사면에 깊게 패인 기왓골, 기와의 끝마다 새겨진 막새기와모양, 밑면의 서까래표현 등은 거의 실제 건물의 기와지붕을 보고 있는 듯하다. 꼭대기에 있는 머리장식은 탑을 옮기기 전까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탑을 옮겨 세울 때 그 안에서 금동탑지(金銅塔誌)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통일신라 문성왕 6년(844)에 이 탑을 세웠음을 알게 되었다. 사리탑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단아한 기품과 깨끗한 솜씨가 잘 어우러져 있다. 이후 대부분의 사리탑이 이 양식을 따르고 있어 그 최초의 의의를 지니는 작품이다. 원래 강원도 흥법사터< 興法寺址 >라고 전해지는 곳에 있었던 신라말<新羅末>의 고승<高僧>염거화상<廉巨和尙>의 부도<浮屠>로 탑골공원에 옮겨왔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놓았다.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이 탑은 신라부도<新羅浮屠>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며 짜임새가 있고 아담한 솜씨로 신라<新羅>말기<末期>인 문성왕<文聖王>6년(844)에 세워졌다. 이 부도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우아한 기품과 소박한 조각 솜씨를 보이고 있으며 세부의 조각도 아담하다. 원 위치에서 옮겨 올 때 탑속에서 금동탑지<金銅塔誌>가 발견되어 조성년대<造成年代>를 알 수 있게 되었다.(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에는 (전)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인데...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1,01040000,11&queryText=((V_KDCD=11)) <and>(((V_NO >=104)<and>(V_NO <= 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