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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의 허균 묘역1

천지연미소바위 2015. 7. 14. 17:02

허균(許筠, 1569. 12. 10~1618. 10. 12)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작가, 정치가, 시인이었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성수(惺叟), 백월거사(白月居士).

  허균은 부친을 일찍 여의었으나 20세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이복 형 허성의 집과, 강릉의 외가를 오가며 어렵지 않은 소년기를 보냈다. 17세인 선조 18(1585) 초시에 급제하고 김대섭의 차녀와 결혼한다. 친형 허봉이 이이를 탄핵하다가 함경도로 유배되고 김성립에게 출가한 누이 허난설헌은 시댁과 불화를 겪고 자식들은 연달아 세상을 떠나서 힘든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허균이 스무 살 때에 허봉은 금강산에서 병사를 한다. 24세에 임진왜란을 피하던 부인 안동 김씨가 단천에서 첫아들을 낳고 사망하고 어린 아들도 전란 중에 병사한다. 가족을 잃은 허균은 이후 집필에 몰두하고 외가 뒷산의 이름을 따서 호를 교산으로 사용한다. 그 후 허균은 동인의 초대 당수인 선산김씨 김효원의 딸과 재혼한다서자를 차별 대우 하는 사회 제도에 반대하였으며,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당시 주류가 아니었던 서자나 기생 같은 천민들과도 교류했다. 불교를 신봉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벼슬은 정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예조판서에 이르렀으나 무려 7번이나 관직에서 파직됐다. 허균의 문집은 그가 죽음을 예상하고 외손자 이필진에게 전해줘서 후대에 전래되었다. 최초의 국문소설인 홍길동전이 그의 작품으로 판명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칠서지옥'으로 위기를 겪었고 이이첨과 결탁해 대북에 가담하여 실세가 되어 형조판서 등 고위 관직에 올랐다.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으로 가담하였다. 역모에 휘말려 능지처참을 당했다.

  허균선생 묘는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 산 61(원삼면 수정로6번길 54-39)에 있다. 이곳에 부모님과 형들도 같이 있다. 그러나 시골 산 번지라 넓은 지역이다. 대략 원삼면 맹리 639-3’로 찾아 가면 될 것이다. 허균은 초당 허엽의 둘째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이다. 허엽은 서경덕의 문인으로서 학자·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이다. 허엽은 강릉부사로 있을시 초당두부를 만들어 팔다 파직 당했다. 청주한씨와 결혼하여 12녀를 얻었으나 딸은 모두 일찍 죽고 아들 허성만 살았다. 청주한씨가 죽고 강릉김씨와 재혼하여 허봉, 허난설헌, 허균을 낳는다. 강릉김씨는 예조판서 김광철의 딸이다. 허성은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성격이 무난했으나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면모도 있었다. 허봉은 타고난 문장가였으며 허난설헌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허균은 유성룡과 허난설헌의 가르침을 받았다. 허난설헌의 묘는 경기도 광주에 있으며 난설헌은 호이고 본명은 허초희이다. 남편은 김성립이다. 27세에 죽었으며 외롭게 산 인물이다.

 

광주 허난설헌묘(경기도 기념물90, http://blog.daum.net/dbsqkqh/4149)

강릉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http://blog.daum.net/dbsqkqh/1043)

강릉 이광노 가옥(허난설헌 생가터, 강원도 문화재자료59, http://blog.daum.net/dbsqkqh/1045)

 

 

 

 

 

 

 

 

 

 

 

 

 

 

 

 

 

 

 

허균 묘

 

 

 

허균의 친형인 허봉 묘

 

 

 

 

 

이복형인 허성 묘

 

 

 

 

할아버지 허한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