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천정사 : 파평 윤씨의 제실. 입향조 윤길이 지었다. 한때 인재양성 공간으로 쓰였다
수벽사 : 느티나무 숲 물레방아 옆에 자리 잡은 수벽사는 고려시대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9성을 쌓은 윤관(?∼1111년)장군을 모신 사당
고려국 한림학사 둔옹 퍄평 윤선생 신도비
퍄평윤씨 대언공 장방손 한림공파 유래비
앞에는 해보면 상곡리 635번지에 모평 마을 숲이 있다.
신천강씨 열녀비 : 정유재란 때 왜군들에 의해 두 팔이 잘리면서까지 남편 윤해의 죽음을 막으려했던 강씨부인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려각.
충노비 : 윤해와 신천강씨 부인이 죽임을 당하자 이 소식을 들은 장남 17살 청립은 노비였던 도생과 사월에게 4살짜리 동생(정립)을 부탁하고 전쟁터로 달려 나갔으나, 청립도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도생과 사월은 주인의 빈자리를 대신해 정립을 잘 키워 윤씨 가문을 지켰다. 나중에 이 집안의 후손들이 충노비를 세웠다.
고려 개국공신인 윤신달(893~973)이 파평윤씨의 시조인데, 혜종 때 동경(경주) 대도독으로 부임해 30년간 중책을 맡았다. 윤관은 윤신달의 5세손이다. 윤관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수태보·문하시중, 감수국사에 올랐고 예종 묘정에 배향됐다. 공신에 오르고 영평현(파평) 개국백에 봉해지면서 윤씨의 본관이 이곳으로 정해졌다. 고려때 여진이 점유하던 9성을 회복한 윤관(?~1111)은 우리의 땅, 동·서·북 간도가 거란 등에 의해 잠시 점유되었을 뿐 수천년 우리의 영토임을 증명하는 위인이다. 점령은 했지만 자치권을 주었다. 11세 윤보(1252~1329)는 충열왕 때 문과 급제해 성균감대사성, 서북면도지휘사를 거쳐 수첨의찬성사에 오르고 영평군에 봉해졌다. 그의 큰아들 윤계종(?~1346)은 충혜왕비 희비의 아버지로서 충정왕(고려 제30대 왕, 재위 1348~1351)의 외조부이고, 찬성사를 역임했다. 윤보의 둘째아들 윤안적(1269~1319)은 충정왕 때 과거급제하여 대언(승지와 같은 직책)을 역임하고 대언공파를 열었다. 15세 윤길(1368~1462)은 목은 이색에게 수학해 문과급제하고 한림학사를 역임한 고려말 문신이다. 충절을 지켜 조선 개국에 불참하고 벼슬하지 않았다. 계유정난 이후에는 사촌매제인 김종서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문이 원인이 돼 제주에 유배됐고 사면받아 돌아가는 길에 산자수려한 전라도 모평현에 터를 잡아 파평윤씨의 모평 세거가 시작됐다. 21세 윤형수(1521~1587)는 하서 김인후의 문인으로 참봉·선정관을 역임하고 임곡유고를 남겼다. 윤형수의 아들 윤해(1541~1597)와 신천강씨 부부는 정유재란 때 왜적의 칼에 희생됐는데 신천강씨가 남편을 해치려는 칼날을 두팔로 막아 잘려나가고 결국 부부 모두 처참하게 죽임당했다는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열부강씨정려가 건립(1812)됐다고 한다. 부부의 어린 두 아들 윤성립, 윤정립(1594~1683)을 보살펴 길러준 이 집안 노비 ‘도생과 사월’의 은덕을 기려 세워진 <충노비>가 전쟁의 참혹함을 이겨낸 시대를 기억하게 한다. 24세 윤은로(1612~1686)는 병자호란을 맞아 은봉 안방준과 의병을 일으켰다. 효자로 알려진27세 윤동훈(1716~1770)이 대언공파 윤동훈종가를 열고 대대로 가학의 전통을 잇게 했다. 31세 윤자화(1825~1884)는 문과 급제하고 사헌부 지평을 거쳐 대사헌에 오르고 ‘귀영재유집’을 남겼다. 종가는 윤자화 과거급제 시권과 강서채점지(과목별 점수기록부)를 비롯한 유물들과 학문하며 영농했던 터전의 귀영재, 도천헌, 수벽사, 영양재 등 고건축물들을 보존하며 선조의 충절정신 계승에 힘쓰고 있다.(출처 : 남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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