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선조가 직접 써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송언신(1542∼1612)에게 남모르게 보낸 서찰 7건이다. 송언신은 선조 10년(1577)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쳐 호조를 제외한 5조의 판서를 지냈다. 명종 때에는 불교를 배척하여 중 보우를 처형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서첩은 원래 길게 이어있던 종이를 옆으로 적당하게 잘라, 그 앞뒤에 따로 표지를 붙인 것이다. 정조가 이 서첩을 보고 나서 7건에 대한 내용해설을 곁들여 직접 발문을 지어내리고, 호조판서에게 명하여 원첩을 궤에 담아 송언신의 후손에게 되돌려주고 따로 한 부를 똑같이 써서 내각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이 어사첩은 이때 모사된 것이다. 『선조어서사송언신밀찰첩』은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면서 왕의 자녀 3인을 찾아 보호해 달라는 내용과 그 공을 높이 사서 물품을 하사한다는 내용 등이 들어있으며, 크기는 가로 24.2㎝, 세로 36.6㎝이다. 『정조어제선조어서밀찰발』은 『선조어서밀찰』을 보고 소감을 적은 것으로 총 59줄을 6줄씩 총 10면으로 나누어 놓았다. 「만력십삼년십이월십팔일예조입안」은 송언신에게 자식이 없어 10촌형되는 사람에게서 자식을 입양하는 것을 만력 13년(선조 18년,1585) 2월 18일 예조에서 허락한다는 문서이다. 이 책을 통해 선조가 지방관리들을 통제하는 수완을 엿볼 수 있으며, 당시 조선의 국방, 군신간의 사신왕래와 선물교환, 가족제도 및 송언신의 가계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된다. ※ 2004년 5월 7일 보물 제914호 선조어서사송언신밀찰첩(부)정조어제선조어서밀찰발외에서 보물 제941-1호 선조어서사송언신밀찰첩으로 지정번호 및 명칭 변경됨.
본서첩(本書帖)은 조선 제(第)14대왕(代王) 선조(宣祖)가, 이조판서(吏曺判書) 등을 역임(歷任)한 문신(文臣) 호봉(壺峰) 송언신(宋言愼)(1542∼1612)에게 보낸 어서밀찰(御書密札) 7건(件)을 첩장(帖裝)한 것이다. 이 어서밀찰첩(御書密札帖)에 대한 정조왕(正祖王)의 어친필(御親筆) 발문(跋文)을 별책(別冊)으로 첩장(帖裝)하여 도합 2책이 같이 보관되어 있다. 이 선조어찰원첩 (宣祖御札原帖)은 호봉(壺峰)의 후손가(後孫家)에 소장(所藏)되어 왔는데, 정조(正祖)가 연신(筵臣)을 통(通)하여 알고는 가져오게 하여 어람(御覽)하고 나서, 7건(件)에 대한 내용해설(內容解說)을 곁들인 친제자필(親製自筆)의 발문(跋文)을 지어 내리고, 또한 후손가(後孫家)가 빈궁(貧窮)하여 잘 간직하기 어렵다 하여 호조판서(戶曺判書)에게 명하여 원첩(原帖)을 개장(改粧)해서 궤에 담아 본가에 되돌려 주고 따로 일본(一本)을 모사(模寫)하여 내각(內閣)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이 어서첩(御書帖)은 그때 개장(改粧)한 것이다. 정조(正祖)의 명(命)에 의하여 광주(廣州)에 어서각(御書閣)이 건립(建立)되어 선조어서밀찰(宣祖御書密札)과 정조어제어필발(正祖御製御筆跋)을 이곳에 보관해 오다가 1970년 성남시(城南市) 지구개발(地區開發)로 그 지역이 수용되면서 현지 주소지인 심석리(心石里) 모선재(慕先齋)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한다. 송언신(宋言愼)의 영정(影幀)도 같이 보관되어 있는데 화상찬(畵像贊)도 정조(正祖)의 친제어필(親製御筆)이다. 송언신(宋言愼)(중종 37, 1542∼광해 4, 1612)은 선조(宣祖) 때의 문신(文臣). 자(字)는 과우(寡尤), 호(號)는 호봉(壺峰), 본관은 여산(礪山). 류희춘(柳希春) ·노수신(盧守愼)·이황(李滉)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닦고 명종 때 불교를 배척하고 중 보우(普雨)의 처형을 건의하였다. 선조(宣祖)10년(1577)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검열(檢閱) ·정언(正言)을 지냈다. 1591년에 대사간(大司諫) ·이조참의(吏曺參議) ·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1592년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거쳐 함경(咸鏡) ·강원(江原)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를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1593년에서 1599년사이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재직시(在職時) 선조(宣祖)가 어찰(御札)을 잇달아 내리고 은사(恩賜) 또한 많았다. 그 뒤 이조 참판을 거쳐 호조(戶曺)를 제외한 나머지 5조(曺)의 판서(判書)와 좌(左) ·우참찬(右參贊)을 지냈다. 광해(光海) 때에 파면되어 시골에서 죽었다. 시호는 영양(榮襄). (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9410100,31&queryText=((V_KDCD=12)) <and>(((V_NO >=941)<and>(V_NO <= 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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