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인천/유형문화재,기념물

파주 이이선생 묘(경기도 기념물15호)

천지연미소바위 2011. 9. 27. 12:45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대학자인 율곡(栗谷) 이이(1536∼1584)선생의 묘소이다.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어머니 신사임당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명종 13년(1548) 13세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후 모두 9차례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에 호조좌랑으로 처음 임명된 후 황해감사, 대사헌 등을 거쳐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을 예견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으며, 대동법의 실시와 사회제도의 개혁에 노력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룬 유학자로 근본원리를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학문연구의 태도로 삼았으며, 학문을 이론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책으로 민생과 국가 재정 문제에 적용하려고 하였다. 선생의 저서로는『성리설』,『성학집요』,『격몽요결』등이 있다. 현재 묘역에는 선생의 묘와 부인 곽산 노씨의 묘가 위·아래로 인접해 있으며, 묘 오른쪽에는 묘비가 있고, 좌우로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이 한 쌍씩 있다. 후대에 묘비 1기가 추가되었으며, 신사임당 묘를 비롯하여 가족묘 13기가 함께 조성되어 있다.(출처 : 문화재청)

 

 

  율곡 이이선생 묘는 파주 율곡선생유적지 안에 있다. 율곡 이이는 왜란을 예견하고 10만 양병론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이선생은 왜란 8년전에 돌아가셨다. 8년 후인 1592년 왜군이 침입하여 서울이 함락되고 임금이 몽진하자 아들과 조카들이 부인에게 피난갈 것을 간청하였으나 부인은 이를 거절하고 이곳으로 와서 시묘하던 중 왜군에게 항거하다가 몸종과 함께 순절하였다. 후손들이 돌아와 보니 어머니와 몸종을 분간할 수 없어 선생과 합장하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선생 묘 뒤에 함께 묻었다고 한다. 

 

 

 

 

 

 

 

 율곡 묘에서 내려다본 형님 이선 묘(사진에서 앞쪽, 맨 위), 부모 묘(이원수, 신사임당 묘-가운데), 이이 받 아들 이경림 묘(맨 아래)

 

 

 

묘 아래에 홍수 피해로 보수 작업하는 모습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3,00150000,31&queryText=((V_KDCD=23))%20<and>(((V_NO%20>=15)<and>(V_NO%20<=%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