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명승, 사적

원주 거돈사지(사적168호)

천지연미소바위 2011. 10. 1. 19:16

  현계산 기슭의 작은 골짜기를 끼고 펼쳐진 곳에 있는 절터이다. 발굴조사 결과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처음 지어져 고려 초기에 확장·보수되어 조선 전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밝혀졌다. 절터에는 중문터, 탑, 금당터, 강당터, 승방터, 회랑 등이 확인되었는데,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2층 건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문지 북쪽의 3층석탑(보물 제750호)은 처음 세워질 때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탑의 동쪽에는 원공국사 지조(930∼1018)를 위한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제78호)가 있는데, 1025년 최충이 문장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탑비와 함께 원공국사승묘탑(보물 제190호)이라 불리는 부도가 있었는데 현재는 경복궁 뜰 안에 옮겨 놓았다. 거돈사는 고려 초기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법안종의 주요 사찰이었지만, 고려 중기 천태종이 유행하면서 천태종 사찰로 흡수되었다. 거돈사는 신라말 고려초의 절터로서 보기 드문 일탑식 가람으로 주목할 만한 곳이다. ※(거돈사지 → 원주 거돈사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거돈사(居頓寺)는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전하나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문헌자료는 없다. 현계산(賢溪山) 기슭의 작은 골짜기를 끼고 펼쳐진 약 7,500평 넓이의 절터는 유존(遺存)상태가 양호한데, 1984년의 정비 보수공사와 1989∼1992년의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대체적인 모습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 결과 거돈사는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창건되고 고려초기에 확장·중창되어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조선 전기까지 존속하였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산지(山地) 가람인 거돈사의 가람배치는 당시의 사찰로는 보기 드문 신라의 전형적인 일탑식(一塔式) 형식으로서, 남북을 중심축으로 하여, 가운데 중문지(中門地)가 있고, 중문지 앞에는 축대가 있다. 중문지 좌우에 회랑지(回廊址)가 동서로 나아가다가 북으로 꺾여 강당지 기단(講堂址 基壇)과 연결된다. 중문지 북쪽에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 양식을 따른 삼층석탑(三層石塔)(보물 제750호)이 있는데, 창건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탑 북쪽에 있는 금당지(金堂地)는 고려 초에 중창된 것으로서 현재 전면(前面) 6줄·측면(側面) 4줄의 주초석이 남아 있어 금당의 규모가 전면 5칸·측면 3칸인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금당지 중앙에는 높이 약 2미터의 화강석 원형 불대좌(圓形 佛臺座)가 놓여 있다. 이러한 구조와 크기로 미루어볼 때 금당은 외관(外觀) 2층이며 내부가 통층(通層)으로 된 건물이었으며, 본존상은 대좌석 상면에 철이나 청동록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등신불보다 큰 석조좌상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금당지 뒤에는 강당지가 있으며, 또 그뒤에는 승방지(僧房地)가 있다. 3층석탑으로부터 동쪽 약 110미터 되는 지점에 원공국사승묘탑비(圓空國師勝妙塔碑)(보물 제78호)가 있다. 현종(顯宗) 6년(1025)에 건립된 이 비는 최충(崔충)이 문장을 짓고, 김거웅(金巨雄)이 글씨를 썼다. 원공국사 지종(圓空國師 智宗)(930∼1018)은 17세에 계를 받고 고려 광종(光宗) 초기의 승과(僧科)에 급제한 뒤, 중국에 유학하여 법안종(法眼宗)을 배웠다. 당시 남중국에서 크게 유행하던 법안종은 선종(禪宗) 계통이면서도 교선일치(敎禪一致)를 표방하였다. 이러한 교리는 당시 전제왕권 수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혁정치를 펴던 광종의 관심을 끌게 되었으며, 지종은 광종의 비호를 받으면서 법안종 세력을 고려 불교계에 크게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광종이 사망하자 그의 급진적인 개혁정치가 좌절되면서 법안종 세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고, 지종도 89세인 1018년 거돈사에서 사망하였다. 거돈사는 고려 초기의 불교계를 주도해 나가던 법안종의 중심사찰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아래 이 절이 크게 중창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 중기에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개창한 천태종(天台宗)이 널리 유행하면서 거돈사는 천태종 사찰로 흡수되었다. 현종 때 왕사(王師)로 책봉되었던 지종은 사후 원공국사(圓空國師)로 추증되었으며, 탑비와 함께 비의 서쪽 기슭에 부도가 건립되었다. 원공국사승묘탑(圓空國師勝妙塔)(보물 제190호)이라고 불리는 이 부도는 일본인들이 옮겨간 것을 해방 후 다시 찾아 현재 서울 경복궁 뜰에 서 있으며, 원래 부도가 있던 자리에는 지대석(地臺石)과 함께 간단한 표지석만 남아 있다.(출처 : 문화재청)

 

원공국사승묘탑(보물190호)의 재현품이 있음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보물78호)

 

 

거돈사지 삼층석탑(보물750호)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3,01680000,32&queryText=((V_KDCD=13))%20<and>(((V_NO%20>=168)<and>(V_NO%20<=%20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