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있다.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더욱더 세력을 확장하여 조선을 침략하는 등 압력을 행사하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 나라의 이름을 청으로 바꾼 여진족이 조선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두 나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결국 인조 14년(1636) 청나라 태종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전하던 인조가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가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을 하면서 부끄러운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삼전도비 → 서울 삼전도비)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출처 : 문화재청)
현장 안내판에 있는 주소인 석촌동289-3번지의 어린이 공원에 있을 때인 2010년 3월 7일에 가보았는데 부지런하여 이제서 정리하네요. 2010. 4. 25일 석촌호수 서호언덕인 잠실동 47번지로 이전했지요.(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4221734485&code=950201).
삼전도비의 정식명칭은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 1639년 병자호란에서 패한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올린 수항단(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187번지)에 세워진 것. 청의 강요에 의해 청 태종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삼전도비는 치욕의 역사이자 수치스런 역사의 유물. 예나 지금이나 강자만이 살아남는 현실로 역사는 승자의 기록. 영원한 우방도 적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의 힘을 키워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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