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은 개천(開川, 인공적으로 물길을 만든 하천)으로서, 도성을 둘러싼 목멱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등에서 발원하여 도성 중심부를 서에서 동으로 흘러 중랑천에서 합류하며, 그 길이는 11Km에 달한다. 청계천에는 모전교(毛廛橋), 광통교(廣通橋), 장통교(長通橋), 수표교(手標橋), 하랑교(河浪橋), 효경교(孝經橋), 마전교(馬廛橋), 오간수문(五間水門), 영도교(永渡橋) 등 많은 다리와 수문이 설치되었으며 그 변화상은 도성의 변화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들 다리 관련 유구들은 조선시대 토목기술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설치 및 변천과정의 연구를 통해 도시기능의 확대 및 도성관리체계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 광통교지 : 광통교는 도성내에서 가장 큰 다리로 경복궁-육조거리-종루-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남북대로를 연결하는 도성 안 중심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이 위치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였다. 조선 초 도성건설때 놓여진 것으로 보이는 광통교는 처음에는 토교(土橋)였다가 태종 10년(1410)에 석교(石橋)로 놓이게 되었으며, 이때 신덕왕후 강씨의 릉인 정릉의 석물을 이용하였다고 전한다. 영조 38년(1762)에 증축되었다.
□ 수표교지 : 수표교는 세종 2년(1420)에 마전교라는 이름으로 축조되어 세종 23년(1441)에 서편 상류에 인접하여 박석을 깔고 수심을 측정하기 위한 수표를 세운 이후 수표교라 이름 하였다 한다. 수표교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어 장충단공원에 복원되어 있으며, 길이 27.6m, 폭 7.5m, 최대높이 3.4m로 실측되었다. 한편 수표석주는 보물 제838호로 지정되어 있다.
□ 오간수문지 : 오간수문은 도성 개축시에 물길을 고려하여 청계천에 놓은 성벽의 하부구조물로 동대문에서 광희문으로 연결되는 부분에 축조되어 있었다고 한다. 다섯칸의 홍예문이 있었으며, 상부에 성벽이 축조되어 있었던 사진이 전하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서울 청계천 유적(광통교지, 수표교지, 오간수문지) 중 광통교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 졌다. 태종, 왕자의난, 신덕왕후 강씨와 관련이 있다.
태조(이성계)7년인 1398년 8월과 정종2년인 1400년 1월에 걸쳐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태조의 왕자들 간에 벌어진 2번의 싸움으로 1차 왕자의 난을 방원의 난(무인정사, 정도전의 난)이라고 하며 2차의 왕자의 난을 방간의 난(박포의 난)이라고 한다. 태조는 신의왕후 한씨와의 사이에 방우, 방과(정종), 방원(태종) 등 여섯 형제가 있었고,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와의 사이에 방번, 방석이 있었다. 조선 성립 후 태조는 신덕왕후의 소생인 방석을 후계자로 선정했다. 신의왕후 소생인 방원은 이숙번 등의 휘하 인물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세자 방석 등을 살해했다. 이를 제1차 왕자의 난. 세자로 태조의 제2자 방과(정종)를 옹립했는데 정종은 정비인 정안왕후 김씨와의 사이에서 소생이 없어 1400년 1월에 신의왕후의 소생인 방간과 방원이 다시 세자의 지위를 놓고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를 제2차 왕자의 난(박포가 방간을 충동해 일어나 박포의 난). 왕이 된 태종 이방원은 미웠던 아버지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릉인 정릉의 석물을 갖다가 광통교를 만드는데 사용했다 한다.
광통교는 도성내에서 가장 큰다리로 사람이 많이 다니는 다리로 처음에는 토교였다가 태종 10년에 석교로 되었다.
정릉의 석물을 이용할 때 석물이 거꾸로 되어 있는 것도 있는데 일부러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많이 밟고 다니라고 광통교에 사용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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