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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387호)

천지연미소바위 2012. 1. 21. 15:46

   회암사터에 서 있었던 비석으로, 고려말의 승려인 나옹(懶翁)화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나옹(1320∼1376)은 1344년에 회암사로 들어가 불교에 입문하였다. 1358년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의 부름을 사양하고 구월산과 금강산 등에서 은거하다가 회암사로 다시 돌아와 절을 크게 새로 지어올렸다. 신륵사에서 57세로 입적할 때까지 불법만을 행하였으며, 입적한 후 시호를 ‘선각’이라 하고 그 이듬해에 비를 세웠다. 비의 모습은 당나라의 형식을 닮은 복고풍으로, 비의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았다. 즉 비의 몸돌 윗부분에 두 마리의 용을 새긴 후 그 중앙에 비명칭을 새기는 공간을 두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큰 돌을 단순한 조각기법으로 새겨 다소 추상적으로 다루어 놓았으나, 비머릿돌에 새겨진 용의 조각은 정갈하면서도 역동적이다. 비문의 글은 이색이 짓고, 글씨는 권중화가 쓴 것으로, 나옹화상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비의 글씨는 예서체로서,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 이후 고려말에 와서 처음이다. 이는 당시의 예서 연구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한 예이다. 1997년 보호각이 불에 타 비의 몸돌이 파손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를 실시한 후 보존관리상 2001년도에 경기도박물관에 위탁 보관하고 있다. 비가 있었던 원래의 자리에는 비 받침돌인 귀부가 그대로 있으며, 원형을 본따 만든 비가 세워져 있다. 이 석비는 고려말(高麗末) 명승(名僧) 나옹(懶翁)을 추모하기 위하여 우왕(禑王) 3년(1377)에 건립한 것이다. 이 비석은 귀부(龜跌) 위에 비좌(碑座)를 마련하고 비신(碑身)을 세웠으며 별개석(別個石)의 이수(이首)가 없이 비신 상단부(上端部)에 용틀임으로 대신하였다. 귀부는 둔중하나 이수의 용틀임은 사실적이어서 주목된다. 선각(禪覺)은 고려말(高麗末)의 명승(名僧)으로 고려 충숙왕(忠肅王) 7년(1320)에 출생하여 1376년 입적(入寂)할 때까지 37년 동안 불가에 몸 바친 분이다. 비문은 고려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짓고 비문의 글씨는 동고(東皐) 권중화(權仲和)가 썼다. 1997년 화재로 인한 보호각의 소실로 이수와 함께 있는 비신이 파손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를 실시한 후 보존관리상 2001년도에 경기도박물관에 위탁보관하고 있다. 원위치에는 귀부가 그대로 있으며, 모조비가 건립되어 있다.(출처 : 문화재청)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는 무학대사비가 있는 반대편 능선에 있는데 성묘객의 부주의로 비신이 훼손되어 보존처리 후 경기도박물관에 위탁보관하고 모조비만이 서있네요.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3870000,31&queryText=((V_KDCD=12))%20<and>(((V_NO%20>=387)<and>(V_NO%20<=%203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