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명승, 사적

서울 선릉과 정릉(사적199호)

천지연미소바위 2012. 7. 7. 14:47

선릉은 9대 성종과 부인 정현왕후의 무덤이다. 성종은 유교사상을 정착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사림을 성장시켜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정치기반을 조성함으로써 조선 초기의 전반적인 체제를 안정시켰다. 선릉은 왕릉과 비릉이 각각 다른 산등성이에 있는 동원이강의 형식으로 왼쪽 등성이의 비릉에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고, 다른 석물들은 왕릉과 같으며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왕릉에는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그안에 동물의 머리에 사람의 모습을 한 십이지신상을 새겼으며, 세조의 광릉 이후 세우지 않았던 병풍석을 성종의 선릉부터 다시 세웠다. 난간석은 12칸이며 그 밖에 양석·호석·망주석·문인석 등의 석물이 있다. 문·무인석의 얼굴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나 몸통은 입체감이 없다. 정릉은 11대 중종의 무덤이다. 중종은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기위해 노력하였으나, 개혁파와 공신파의 정치적 논쟁이 끊이지 않아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정릉은 원래 중종 제1계비인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의 오른쪽 언덕에 있었으나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고 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선릉의 석물제도를 본떴다. 조선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고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다. 임진왜란 때는 선·정릉의 양릉이 훼손되는 변을 겪게 된다. 재실(齋室)은 양릉의 사이에 있으며, 여름철의 침수를 피하기 위해 층단에 지었는데 이러한 예는 선릉·정릉 뿐이다. ※(선릉·정릉 → 서울 선릉과 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선릉은 제9대 성종대왕(成宗大王)과 동계비(同繼妃)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의 릉(陵)이다. 성종대왕(成宗大王)은 추존(追尊)된 덕종대왕(德宗大王)의 제2자(第2子)로서 세조(世祖) 3년(1457년) 7월 30일 경복궁(景福宮) 동저(東邸)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휘(諱)는 혈(혈)이고 모후(母后)는 추존(追尊)된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이다. 세조(世祖) 7년(1461년) 자산군(者山君)에 봉(封)해지고 세조(世祖) 14년(1468년) 예종(睿宗)이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되자 자을산군(者乙山君)으로 봉(封)해졌으며 예종(睿宗) 원년(元年)(1469년) 11월 28일 예종대왕(睿宗大王)이 승하(昇遐)함에 세조대왕(世祖大王)의 비정희왕후 윤씨(妃貞熹王后 尹氏)의 명(命)으로 그날로 승통(承統), 경복궁(景福宮)에서 즉위(卽位)하였으니 춘추 13세(春秋 13歲)였다. 세조대왕비 윤씨(世祖大王妃 尹氏)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으며 성종(成宗) 7년(1476년) 철렴(撤簾)으로 친정(親政)하였다. 성종(成宗)은 유교사상(儒敎思想)을 정착(定着)하여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實現)하고자 숭유억불(崇儒抑佛)을 강화(强化)하고 사림(士林)을 근왕세력(勤王勢力)으로 성장(成長)시켜 훈구세력(勳舊勢力)을 견제(牽制)하여 정치기반(政治基盤)을 조성(造成)하고 도학정치(道學政治)를 확립(確立)함으로써 조선조 초기(朝鮮朝 初期)의 전반적(全般的)인 체제(體制)를 안정(安定)시켰으며 압록(鴨錄)·두만강(豆滿江)의 건주야인(建州野人)을 정벌(征伐)하여 변방(邊方)을 굳건히 하고 홍문관 사가독서당제도(弘文館 賜假讀書堂制度)를 두어 학자(學者), 문인(文人)을 우대(優待)하는 한편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완성(完成)과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동국통감》(東國通鑑), 《동문선》(東文選), 《오례의》(五禮儀), 《악학궤범》(樂學軌範) 등을 편찬(編纂)케 하여 제반 문물제도(諸般 文物制度)를 정비(整備)한 현군(賢君)이었다. 종(成宗) 25년(1494년) 12월 24일 창덕궁 대조전(昌德宮 大造殿)에서 승하(昇遐)하니 재위(在位) 25년이었고 춘추 38세(春秋 38歲)였다. 연산군 원년(燕山君 元年)(1495년) 1월 14일 묘호(廟號)를 성종(成宗)으로, 릉호(陵號)를 선릉(宣陵)으로 하였으며 이 해 4월 6일 광주부 서면 학당동 임좌병향(廣州府 西面 學堂洞 壬坐丙向)(북북서에서 남남동향)(北北西에서 南南東向) 언덕에 국장(國葬)하였다. 성종(成宗)의 계비(繼妃)인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는 본관(本貫)이 파평(坡平)으로우의정(右議政)이며 영원부원군 윤호(鈴原府院君 尹壕)의 녀(女)로서 세조(世祖) 8년(1462년) 6월 25일 충정도 신창현 관아(忠淸道 新昌縣 官衙)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모친(母親)은 연안부부인 전씨(延安府夫人 田氏)이다. 성종(成宗) 4년(1473년) 6월 대내(大內)에 선입(選入)되어 숙의(淑儀)에 봉(封)해졌으며 연산군(燕山君)의 생모 윤씨(生母 尹氏)가 성종(成宗) 10년(1479년) 폐비(廢妃)됨에 따라 그 이듬해 11월 8일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었다. 중종(中宗) 25년(1530년) 8월 22일 경복궁 동궁 정전(景福宮 東宮 正殿)에서 승하(昇遐)하니 춘추(春秋) 69세였으며 소생(所生)은 중종대왕(中宗大王)이다. 이해 8월 27일 시호(謚號)를 정현(貞顯)이라 하고 10월 29일 선릉 좌측 간좌곤향(宣陵 左側 艮坐坤向)(북동에서 남서향)(北東에서 南西向) 언덕에 예장(禮葬)하였다. 왕릉(大王陵)엔 병풍석 12면(屛風石 12面)을 세웠으며 병풍석 12면(屛風石 12面)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象)을 새겼다. 현실(玄室)은 회격(灰隔)을 쓰고 병풍석(屛風石)은 세우지 말라는 세조(世祖)의 유교(遺敎)에 따라 세조(世祖)의 광릉(光陵)으로부터 그 이후 조영(造營)된 왕릉(王陵)에 세우지 아니하던 병풍석(屛風石)이 성종(成宗)의 선릉(宣陵)으로부터 다시 세우게 된다. 난간석(欄干石)은 12간(間)이며 난간석(欄干石) 밖으로 양석(羊石)과 호석 각 2쌍(虎石 각 2雙)을 교호 배치(交互 配置)하였으며 릉전(陵前)의 상석 1좌(床石 1座), 그 양측(兩側)에 망주석 1쌍(望柱石 1雙)과 3면(面)의 곡장(曲墻)으로서 제1계(第1階)를 이루고 그 한 단 아래 문인석 1쌍(文人石 1雙)과 마석 1쌍(馬石 1雙)의 상면 배치(相面 配置) 및 중앙부(中央部)에 명등석 1좌(明燈石 1座)로 제2계(第2階)를 이루었으며 제3계(第3階)는 무인석(武人石)과 마석 각 1쌍(馬石 各 1雙)이 설치(設置)되어 있다. 선릉(宣陵)은 동원이강(同原異岡)으로 되어 좌강(左岡)의 비릉(妃陵)엔 병풍석(屛風石)을 세우지 아니하였고 난간석(欄干石), 양·마석(羊·馬石), 상석(床石), 망주석(望柱石)과 명등석(明燈石), 문·무인석(文·武人石)은 대왕릉(大王陵)과 같은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따르고 있다. 석인(石人)의 안면(顔面)은 사실적(寫實的)으로 표현(表現)되었으나 동체(胴體)는 입체감(立體感)이 없다. 정자각(丁字閣)은 양릉(兩陵) 언덕 아래에 있으며 비각(碑閣)은 정자각 동측(丁字閣 東側)에 있다. 비면(碑面)은 전서(篆書)로 조선국성종 대왕선릉 정현왕후부좌강(朝鮮國成宗 大王宣陵 貞顯王后 左岡)이라 쓰고 음기(陰記)가 있으며 영조(英祖) 31년(1755년)에 세운 것이다. 홍살문(紅箭門)은 정자각 남측 참도(丁字閣 南側 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있다. 정릉은 제11대 중종대왕(中宗大王)의 릉(陵)이다. 중종대왕(中宗大王)은 성종대왕(成宗大王)의 제2자(第2子)로서 성종(成宗) 19년(1488년) 3월 5일 탄생(誕生)하였으며 휘(諱)가 역(?)이고 자(字)는 낙천(樂天)이며 모후(母后)는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이다. 성종(成宗) 25년(1494년) 4월 6일 진성대군(晋城大君)에 봉(封)하여졌으며 연산군 12년(燕山君 12年)(1506년) 9월 2일 연산군(燕山君)이 실덕 폐정(失德 弊政)으로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남에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의 명(命)에 따라 연산군(燕山君)은 폐위(廢位), 강화 교동(江華 喬洞)에 유배(流配)되고 경복궁 근정전(景福宮 勤政殿)에서 즉위(卽位)하였으니 춘추 19세(春秋 19歲)였다. 중종(中宗)은 연산주(燕山主)의 폐정(弊政)을 바로잡아 국정(國政)을 쇄신(刷新)하고 민생(民生)을 안정(安定)시키고자 반정공신(反正功臣)을 견제(牽制)하여 개혁(改革)의 실(實)을 얻고자 조광조(趙光祖)등 사림(士林)을 중용(重用)하였으나 신진사류(新進士類)의 개혁책(改革策)이 과격(過激), 급진(急進)하여 개혁파(改革派)와 공신파간(功臣派間)의 갈등(葛藤)이 심화(深化)되면서 중종(中宗) 14년(1519년) 위훈삭제(威勳削除)를 위요(圍繞)한 수구세력(守舊勢力)의 무참(誣讒)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신진사류(新進士類)가 피화(被禍)되고 이후(以後)로도 정쟁(政爭)이 끊이지 않아 조야(朝野)가 안정(安定)되지 못하였으며 삼남(三南)으론 삼포왜란(三浦倭亂) 등 왜관(倭冠)의 노략(鹵掠)이 우심(尤甚)하고 북방(北方)에 야인(野人)의 내침(來侵)이 잦아 비변사(備邊司)를 설치(設置)하였으나 실효(實效)를 거두지 못하였다. 중종(中宗) 11년(1516년)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設置)하여 많은 동활자(銅活字)가 주조(鑄造)되었으며 인쇄술(印刷術)의 발달(發達)로 많은 서적(書籍)이 편찬(編纂)되었으니 《사성통해》(四聲通解), 《속동문선》(續東文選),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與地勝覽) 등(等)이 간행(刊行)되었다. 중종(中宗) 39년(1544년) 11월 14일 환후(患候)로 왕세자(王世子)에 전위(傳位)하고 그 익일(翌日)인 15일 창경궁 환경전(昌慶宮 歡慶殿)에서 승하(昇遐)하니 재위 39년(在位 39年)이었고 춘추 57세(春秋 57歲)였다. 인종 원년(仁宗 元年)(1545년) 1월 5일 묘호(廟號)를 중종(中宗)이라 하였으며 릉호(陵號)를 희릉(禧陵)으로 하였으나 1월 24일 정릉(靖陵)으로 고치고 2월 3일 경기도 고양군 원당리(京畿道 高揚郡 元堂里)의 중종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中宗 第1繼妃 章敬王后 尹氏)의 희릉 우강(禧陵 右岡)에 장례(葬禮)지냈다. 7년 후(後)인 명종 17년(明宗 17年)(1562년) 중종(中宗)의 제2계비(第2繼妃)인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가 후일(後日)을 위하여 정릉기(靖陵基)가 불길지(不吉地)임을 내세워 봉은사 주지 보우(奉恩寺 住持 普雨)와 상의(相議)하고 선릉 동강(宣陵 東岡)이 길지(吉地)라 하여 천릉(遷陵)키로 함에 이 해 9월 4일 현 정릉기 건좌손향(現 靖陵基 乾坐巽向)(북동에서 남동향)(北東에서 南東向) 언덕에 천릉(遷陵)하였다. 릉침(陵寢)엔 병풍석 12면(屛風石 12面)을 세웠고 병풍석(屛風石)엔 와운문(渦雲紋)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象)을 새겼으며 그 밖으로 12간(間)의 난간석(欄干石)을 둘렀다. 양석(羊石)과 호석 각 2쌍(虎石 各 2雙)이 외향(外向)으로 교호 배치(交互 配置)되었고 릉전(陵前)에는 상석 1좌(床石 1座)가 있다. 그 양측(兩側)으로 망주석 1쌍(望柱石 1雙)이 있으며 3면(面)의 곡장(曲墻)이 둘러서 설치(設置)되었다. 한 단 아래 중계(中階)에는 문인석 1쌍(文人石 1雙), 마석 1쌍(馬石 1雙)과 중앙부(中央部)에 명등석 1좌(明燈石 1座)가 있다. 하계(下階)에는 무인석(武人石)과 마석 각 1쌍(馬石 各 1雙)이 있으며 릉상설 석물(陵象設 石物)이 선왕 성종(先王 成宗)의 선릉(宣陵)과 같아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따르고 있다. 릉원(陵原) 아래에 정자각(丁字閣)이 있으며 비각(碑閣)은 정자각 동측(丁字閣 東側)에 있다. 비면(碑面)에 전서(篆書)로 조선국중종대왕정릉(朝鮮國中宗大王靖陵)이라 쓰고 음기(陰記)가 있으며 영조(英祖) 31년(1755년)에 세운 것이다. 정자각 남측 참도(丁字閣 南側 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紅箭門)이 있다. 경기도 고양(京畿道 高陽)의 중종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中宗 第1階妃 章敬王后 尹氏)의 희릉 영역(禧陵 塋域)에서 명종(明宗) 17년(1562년)에 현 정릉기(現 靖陵基)로 천봉(遷奉)하였으나 하절(夏節)엔 침수(浸水)로 보토(補土)에 누만거액(累萬巨額)이 소요(所要)됐고 재실(齋室) 또한 침수(浸水)로 보토(補土)했다. 이로 인(因)하여 후일 중종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後日 中宗 第2繼妃 文定王后 尹氏)의 봉릉시 비릉(封陵時 妃陵)을 정릉 영역(靖陵 塋域)에 조영(造營)치 못하고 경기도 양주 노원 불암산하(京畿道 楊州 盧原 佛巖山下)로 택정(擇定)하게 된다. 조선왕릉 중 대왕(朝鮮王陵 中 大王)만이 단릉(單陵)으로 봉릉(封陵)된 곳은 추봉(追封)된 단종(端宗)의 장릉(莊陵)을 제외(除外)하고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과 중종(中宗)의 정릉(靖陵)뿐이다. 그 뒤 선조대 임진왜란시 왜병(宣祖代 壬辰倭亂時 倭兵) 들이 선·정 양릉(宣·靖 兩陵)을 파훼(破毁)하는 흉변(凶變)을 겪게 되니 소위 이릉지변(所謂 二陵之變)이다. 재실(齋室)은 선릉(宣陵)과 정릉 중간지역 노변(靖陵 中間地域 路邊)에 있다. 재실(齋室)은 노면(路面)으로부터 2계(階)의 층단(層段) 위 최상단(最上段)에 있으니 이는 하절기 침수(夏節基 浸水)를 피(避)하여 상단(上段)에 건립(建立)된 것이며 층단(層段)을 두어 재실(齋室)이 축조(築造)된 곳은 이곳 선릉·정릉(宣陵·靖陵)뿐이다. 선릉·정릉(宣陵·靖陵)의 주산(主山)이라 할 배산(背山)은 산세(山勢)가 낮고 완만(緩慢)하며 좌우(左右)의 호위산세(護圍山勢) 또한 같은 구릉성 임야지(丘陵性 林野地)로서 동편(東便)에는 정릉(靖陵)이 서편(西便)에는 선릉(宣陵)이 있는 바 릉경역(陵境域)은 일반인(一般人)의 출입(出入)과 개전(開田)을 금(禁)하는 지역(地域)임에도 일정시 조선총독부(日政時 朝鮮總督府)는 식량증산 명목(食糧增産 名目)아래 저지대 개간(低地帶 開墾)을 허가(許可)하고 심지어는 양릉(兩陵) 사이 구릉 저지(丘陵 低地)까지 개전(開田)이 허가(許可)되어 릉림(陵林)이 제벌(除伐)되고 개전(開田)되면서 일부 농지(一部 農地)는 릉침(陵寢)보다 북측 상위(北側 上位)까지 미치게 되는 참담(慘憺)한 지경에 이른다. 8·15광복(光復)을 거쳐 6·25전란 후 인근 농민(戰亂 後 隣近 農民)에 의한 개간(開墾)은 계속(繼續)되어 릉침 부근(陵寢 附近)까지 개전(開田)된데다가 1950년도 농지개혁법(農地改革法)에 의하여 농지(農地)는 경작자(耕作者)에게 분배처분(分配處分)되면서 릉역내(陵域內)에서 사유농지(私有農地)가 생기게 된다. 1960년대 서울의 급격(急激)한 비대확장(肥大擴張)으로 인구(人口)의 분산(分散), 주택용지 해결(住宅用地 解決)을 위하여 서울시는 한강 이남(漢江 以南)의 강남지역(江南地域)을 개발(開發)하게 되고 토지구획정리사업(土地區劃整理事業)을 1970년대부터 시행(施行)하면서 선·정릉(宣·靖陵) 동·서·북(東·西·北)의 릉지(陵地)는 택지(宅地)로 변모(變貌)되고 릉침(陵寢)이 간선도로(幹線道路)와 접면(接面)하는 등 현재(現在)의 선·정릉(宣·靖陵) 경역(境域)이 이루어졌으니 도회지(都會地) 속의 고도(孤島)와 같다. 도시계획사업(都市計劃事業)을 주관 시행(主管 施行)한 서울시나 관계당국(關係當局)의 천견단려(淺見短慮)가 아쉬운 것이다.(출처 : 문화재청)

 

 

 선정릉은 서울지하철 2호선 선릉역8번 출구로 나와 230여m를 직진하면 있는데, 서울 강남에 있는 삼릉공원안에 위치한다. 선릉은 조선 9대임금인 성종과 계비인 정현왕후의 능인데 각각 다른 언덕에 조성된 동원이강릉이다. 성종은 수양대군인 세조의 손자이다. 정릉은 조선11대 임근인 중종의 능이다. 중종은 연산군을 몰아내는 중종반정으로 왕이되어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조광조 등 새로운 정치세력을 중용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훈구세력의 반발로 기묘사화가 일어남. 정릉은 왕 혼자 묻혀있는 단릉형태.

 

-선릉

  성종대왕릉(조선 9대임금) : http://blog.daum.net/dbsqkqh/2365

  정현왕후릉(성종대왕 계비) : http://blog.daum.net/dbsqkqh/2366

-정릉-중종대왕릉(조선 11대임금) : http://blog.daum.net/dbsqkqh/2367

 

 

 

  

 

 

선릉 홍살문

 

 

 

 

 

 

 

 

 

 

 

 

 

 

제사 지낼때 신이 오가는 신도.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3,01990000,11&queryText=((V_KDCD=13)) <and>(((V_NO >=199)<and>(V_NO <= 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