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대전/명승, 사적

서산 해미읍성(사적116호) 1

천지연미소바위 2012. 10. 7. 21:41

고려 말부터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바,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17년(1417)부터 세종3년(1421) 사이에 당시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이 곳에 옮기고자 축성(築城)되었으며, 효종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으로 있다가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되고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으로 옮겨졌으며,1914년까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는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성으로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았으며,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들이 빼곡히 있었으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址)가 발견되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해미읍성 → 서산 해미읍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고려 말부터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바,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17년(1417)부터 세종3년(1421) 사이에 당시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이 곳에 옮기고자 축성(築城)되었으며, 효종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으로 있다가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된 후,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으로 옮겨졌으며, 1914년까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는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조선 태종16년(1416)에는 덕산에 있는 내상(內廂)이 너무 깊어 해변에 가깝게 옮기는 방안을 검토하였고, 태종17년(1417)에는 총제 이지실(李之實)을 충청도에 보내어 내상을 이배(移排)하기에 알맞은 장소를 살피게 했으며, 세종3년(1421) 절제사영을 해미로 이설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조선 태종17년(1417)부터 세종3년(1421) 사이에 이 성곽이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효종2년(1651) 11월 13일에 김육(金堉)이 충청도와 경상도 사이에 출몰하는 토적을 제압하기 위해서 도절제사영을 청주로 옮기자는 건의가 있었고, 같은 해 11월 19일에는 홍전(洪?)을 홍청병사(洪淸兵使)로 삼아 청주목사를 겸임하게 하였으며, 효종3년(1652) 1월에 홍청병사 구의준(具義俊)이 구영(舊營)의 병기는 우선 신영의 무고(武庫) 공사가 끝난 뒤에는 옮길 수 있겠지만 월과미(月課米) 630석을 한꺼번에 옮기기가 어렵다는 문제 등을 왕에게 보고한 기록으로 보아 효종3년(1652)에 도절제사영이 청주로 옮기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성의 규모에 관하여는 문종실록(文宗實錄)에 성 둘레가 3,352척이고 성벽의 높이 12척, 여장의 높이 3척, 적대(敵臺)는 18개가 계획되어 2개 완성, 성문은 4개소에 시설하였는데 옹성(甕城)은 없다고 하고 있다. 또한 여장은 688개를 설치하였고, 성벽 둘레에 3,626척의 해자가 파여졌으며, 성 안에는 3개의 샘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당시 절도사영은 해미현의 동쪽3리에 있는데, 석성으로 둘레 3,172척, 높이 15척, 우물 세군데, 군창이 설비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읍성의 둘레가 6,630척, 높이 13척, 치성이 380척, 옹성이 두 곳, 남문이 3칸이며 홍예를 틀고 2층의 다락을 지었으며, 동문·서문도 3칸이나 북문은 없다고 하고 탱자나무로 성을 둘렀으며 샘과 우물이 여섯 개 창고와 호(濠) 및 연못(池)은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의 둘레가 문헌에 따라 다른 것은 용척(用尺)의 차이에서 나타난 것으로 문종실록에 기록된 3,352척은 포백척을 적용하고, 여지지도서의 6,630척은 주척을 적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또한 문종실록에서의 적대는 여지도서에서는 옹성으로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성으로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았으며,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동·서문에는 문루를 건축하였는데, 남문은 진남루(鎭南樓), 동문은 잠양루(岑陽樓), 서문은 지성루(枳城樓)라 하며 북문은 암문형식으로 문루가 없다. 서문의 남측에 인접하여 수구가 성벽 아래로 암거(暗渠)형식으로 마련되었다. 해자는 성벽에서 8m쯤 간격을 두고 윗너비가 10~11m, 아랫너비 5m, 깊이 1.4~2.4m의 규모로 북벽 쪽에 남아 있다. 남문과 서문 사이에는 2개의 적대가 7.9~7.7m, 너비 7.5~7.6m의 규모로 만들어져 있다.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이 빼곡히 있었으며,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址)가 발견되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선조12년(1579)에 이순신이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로 잠깐 근무했던 기록이 있으며, 고종3년(1866) 병인박해 때에는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던 곳으로,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천주교인을 고문한 회화나무와 자리갯돌 등이 남아있다. 또한 1894년 동학혁명 때는 동학군이 이 성을 점거하기도 하였다.(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3,01160000,34&queryText=((V_KDCD=13)) <and>(((V_NO >=116)<and>(V_NO <= 116)))&maxDocs=15000&docStart=1&docPage=10&canasse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