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보,보물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보물329호)

천지연미소바위 2012. 12. 14. 20:29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扶餘 軍守里 石造如來坐像)는 1936년에 충청남도 부여 군수리의 백제 절터를 조사할 때 발견된 불상으로, 곱돌로 만들었으며 4각형의 높은 대좌 위에 앉아 있는 백제 특유의 불상이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작은 머리(육계)가 솟아 있다. 네모난 얼굴은 두 볼에 웃음이 가득하고, 지그시 감은 눈·넓은 코·미소띤 입 등에서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두꺼워 신체의 윤곽이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어깨에서 무릎 위까지 길게 흘러내린 옷자락은 4각형의 대좌(臺座)를 거의 덮고 있다. 이 옷자락의 표현은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적이어서 사실성이 넘쳐난다. 가슴 부근에서는 U자형의 옷주름을 표현하였고, 무릎 밑으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좌우대칭의 Ω형 주름을 나타내고 있다. 두터운 옷자락에 싸여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 점, 좁아진 어깨, 두 손을 배 앞에서 모아 깍지를 낀 단아한 손모양 등에서 옛 수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불상은 형식과 자세로 보아 4, 5세기 중국 불상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나 얼굴 모습이나 신체의 표현 등 세부모습에서 백제화된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완숙한 6세기 중엽 백제불상의 특징을 갖고 있다. 유백색랍석(乳白色蠟石)으로 조각된 이 불상은 백제(百濟)의 특징을 두드러지게 간직하고 있다. 소발(素髮)의 머리에는 작고 팽이 같은 육계(肉계)가 있는데 이것은 초기 중국불(中國佛)의 영향이 강하던 수법과는 다르다. 얼굴은 둥글고 옷에 싸여서 몸의 량감(量感)은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발의 표현도 없다. 좁아진 어깨라든지 양손을 배에 맞잡고 있는 것 등은 그대로 옛날 수법이다. 통견(通肩)의 납의(衲衣)는 매우 두꺼우며 앞가슴이 조금 터진 곳에는 만자(卍字)가 음각(陰刻)되었다. 계단식 의문(衣文)을 그리면서 내려오던 옷자락은 대좌(臺座)를 덮어 상현좌(裳懸座)를 만들고 있는데, 이 상현좌의 옷자락은 아직도 소박성이랄까 탄력성이랄까, 그런 사실감(寫實感)이 넘치고 있다. 대좌(臺座)는 옷자락에 거의 가려 버렸지만 조금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돌을 그냥 4각형으로 깎아 만들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1936년 가을 부여읍(夫餘邑) 군수리(軍守里)에 있는 백제 절터를 조사했을 때 목조탑심(木造塔心) 초석(礎石) 바로 위가 되는 땅 위 약 5피트 되는 곳에서 출토되었다.(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에 이름이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으로 되어 있는데 안내판에는 부처네요. 또 소재지와 관리자가 국립부여박물관으로 되어 있는데 본인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촬영하여 서울문화재로 올립니다. 부여박물관에서 옮겨와 전시중인지 복제품인지 모르겠네요.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3290000,34&queryText=((V_KDCD=12)) <and>(((V_NO >=329)<and>(V_NO <= 329)))&maxDocs=15000&docStart=1&docPage=10&canasse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