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중요-시도 민속문화재

제주 성읍고상은가옥(중요민속문화재72호)

천지연미소바위 2012. 12. 20. 16:42

예전 정의(성읍) 고을에서 '대장간'으로 사용하였다고 전하는 집이다. 19세기 후기에 지었다고 하며 고평오 가옥(중요민속자료 제69호) 맞은편 면사무소 관원들만 사용했다던 ‘남문통’이란 우물이 있던 앞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 길은 객사에서 남문으로 이르는 길가로 정의 고을의 중요한 길목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대장간이 어느 마을에서나 그 마을의 중요한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건물은 대문이 없고 안채(안거리)와 모로 배치한 모커리로 ㄱ자형의 단순한 배치를 이루고 있다. 안채는 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앞에 두고 남향으로 서 있다. 가운데 대청마루(상방)가 있고 오른쪽에 헛간과 작은 방(작은 구들)이 왼쪽에 안방(큰 구들)과 곡식을 두던 '고팡'이 각각 앞뒤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은 평범한 집으로 개조되었지만 예전에는 대장간 가옥구조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문을 들어선 바로 왼쪽에 있는 모커리는 2칸 집으로, 앞에서 볼 때 오른쪽을 헛간, 왼쪽을 부엌(정지)으로 꾸몄다. 부엌은 20세기 중반에 시설한 것으로 보인다. 텃밭(우영)과 같은 공간이 없이 단촐한 집으로 대부분이 개조된 것이지만, 대장간으로 쓰이던 건물이라는 점에서 좋은 연구자료로 주목받고 있다. ※ 위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이 가옥은 중요민속자료 제69호인 성읍(城邑) 고평오(高平五) 가옥과 이웃하여 있다. 곧 고평오 가옥 이문간(大門間) 길 건너 맞은쪽의 예전 관사전용의 음료수 ‘남문통 ’바로 앞에 단출하게 서 있다. 이 가옥은 자그만 안거리(안채, 17평)와 ㄱ자로 놓인 모커리(7평)만으로 이루어졌다. 이문(大門)도 없고 우영(터앝) 같은 공간도 전혀 없다. 19세기 말엽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자그만 가옥의 특색은 예전에 대장간으로 쓰였다는 점에 있다. 안거리(안채) 건물 자체가 대장간이었으므로, 안거리 평면의 간살은 아마도 나중에 시설된 것으로 보인다. 안거리는 작은 방이 있는 3간(間)집이고 모커리에는 정지간(부엌간)이 만들어졌는데, 이 정지간 또한 20세기 중반에 시설된 것으로 보인다. 안거리의 경우, 대장간으로 쓰이던 당시의 가옥구조는 상방(대청마루)과 작은 구들 및 정지간의 구별이 없이 통간으로 이루어졌고 대장간 한가운데에는 땅에 기둥 뿌리를 묻는 생깃기둥(상기둥)을 세우고 경사진 대들보를 얹었던 원초적인 가옥형태였으리라 추측된다. 이 가옥은 객사에서 남문으로 이르는 길가에 세워졌다. 이 길은 예전의 정의고을로서는 중요한 도로다. 이 가옥의 이웃인 객사 남쪽 네거리에 ‘노다리방죽 ’이라는 못이 있고 더구나 이 가옥 바로 맞은편에 관리들이 사용하였던 ‘남문통 ’이란 우물이 있었으며, 지금도 그 자취가 남겨졌음은 주목할만 하다. 대장간은 어느 마을에서든 그 마을의 요소에 위치한다는 점과 부합된다. 우영(터앝) 같은 공간도 없이 단출하게 지어진 이 가옥은 민가로서의 가치보다는 대장간으로 쓰였던 유다른 건물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출처 : 문화재청)

 

 

 

 

 

제주 성읍고상은가옥 앞에 있는데 혹시 예전에 우물...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8,00720000,39&queryText=((V_KDCD=18))%20<and>(((V_NO%20>=72)<and>(V_NO%20<=%2072)))&maxDocs=15000&docStart=1&docPage=10&canasse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