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중요-시도 민속문화재

제주 성읍민속마을(중요민속문화재188호)1

천지연미소바위 2013. 1. 3. 11:17

  제주도는 조선 태종 16년(1416) 안무사 오식의 건의로 5세기라는 긴 세월동안 세 지역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그 중 성읍은 세종 5년(1423)에 지정된 정의현의 도읍지로서 산골 마을이면서 도읍지였다는 특이성을 갖추고 있다. 아늑한 터에, 주변으로는 마을을 둘러싼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의젓하게 감싸고 있다. 또한 길들이 굽이 돌아 나 있고 길과 길이 만나는 지점에 평상과 나무들을 두어 쉼터와 모임장소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 마을 민가는 뭍과는 다른 독특한 건축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대개 一자형 평면을 가진 집 2채를 중심으로 몇가지 배치방식으로 짜여있어 제주도 민속 ·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가옥으로는 조일훈 가옥(중요민속자료 제68호), 고평오 가옥(중요민속자료 제69호), 이영숙 가옥(중요민속자료 제70호), 한봉일 가옥(중요민속자료 제71호), 고상은 가옥(중요민속자료 제72호) 등이 있다. 정의현 관청건물이었던 일관헌을 비롯하여 느티나무와 팽나무(천연기념물 제161호)·정의향교·돌하루방·초가 등 많은 문화재가 있어, 소박하면서도 멋스러운 풍경과 함께 제주도의 고유한 생활풍습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 위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정의(旌義)고을, 곧 성읍민속(城邑民俗)마을은 산촌(山村)이면서도 조선조 초 약 5세기 동안 정의현(旌義縣)의 도읍지였다는 특이성을 지닌다. 아늑한 산촌이면서 도읍지였다는 이중적 성격은 성읍리(城邑里)가 민속마을다운 바탕을 이룬다. 제주도는 조선조 태종(太宗)16년(1416), 안무사(安撫使) 오식(吳湜)의 건의에 따라 약 5세기 동안 삼분(三分)하여 통치했었다. 이는 한라산(漢拏山)을 가운데 두고 대체로 지금의 제주시(濟州市)와 북제주군(北濟州郡)을 합친 산북(山北)은 제주목(濟州牧)으로 하고, 한라산 남쪽 곧 지금의 서귀포시(西歸浦市)와 남제주군(南濟州郡)은 둘로 나눠 서(西)는 대정현동(大靜縣東)은 정의현으로 행정구역이 나누어졌었다. 이 삼현분립통치기간(三縣分立統治期間)은 1914년까지 이어졌었으니 무려 498년간에 이른다. 당초 정의현의 도읍지는 성산읍(城山邑) 고성(古城)이었다. 고성리(古城里)는 그 위치가 정의현의 구석으로 치우쳐졌다는 데서 7년만인 세종 5년(1423)에 도읍을 성읍리로 옮겨 이곳에 터전 삼았음은 성읍리가 지니는 은은한 정경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법하다. 곧 해안마을 표선리(表善里)에서 8㎞쯤 올라간 성읍 민속마을은 평퍼짐한 대평원 속에 의젓한 오름(峰)들이 마을을 뱅 둘러가며 불쑥불쑥 솟아 사방으로 병풍처럼 둘러친 아늑한 산촌이다. 마을 뒤에는 영주산(瀛洲山)(325m)이 후견인처럼 의연하고 백야기오름 ·본지오름 ·무찌오름 ·장자오름 ·갑서니오름 ·설오름 ·개오름 ·모구리오름 ·독자봉(獨子峰) ·가시오름 ·돌리미 ·문서기오름 ·동꺼무니 ·높은오름 ·손지오름 ·아부오름 등 숱한 오름들이 위병들처럼 솟았다.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탁 트인 성읍리의 들판에 들어서 보면 대자연의 향연에 누구나 압도당한다. 성읍리는 1961년 이후 성읍1리와 성읍2리로 나누어졌다. 성읍2리는 성읍1리에서 3㎞쯤 한라산쪽으로 올라간 곳으로‘구렁팟 ’(구룡동(九龍洞))과 ‘안팟 ’(안보동(安保洞))을 합친 행정구역으로서 고작 70가구 미만이다. 정의고을이라면 으례 성읍1리를 지칭한다. 성읍1리는 서상동(西上洞) ·서하동(西下洞) ·동동(東洞) ·서동(西洞)으로 나누어졌고 성뒷골 ·가가비통 ·막은골 ·아득골 ·남문골 ·벌런방죽 ·창뒷골 ·옥골 ·왕돌목 ·둠부리 ·노다리방죽 ·안밧 ·생굣골 ·닥남밧 ·벤저리동산 ·아름터 ·공문동산 ·빌렛동산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동네나 지경이름 가운데는 예전 도읍이었다는 점과 연관된 경우도 몇몇 드러난다. 마을 안에 들어서면 거리 한복판에 천년수로 이름난 느티나무가 원의 중심처럼 의젓하고 그 주변의 훤칠한 팽나무들과 정의현청(旌義縣廳) 일관헌(日觀軒)이 우리의 눈을 끈다(이 느티나무와 팽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61호로, 일관헌은 지방문화재 제7호로 각각 지정 보호되고 있다). 마을 둘레에는 성(城)이 쌓였었고 오늘날에도 성터가 일부 남겨졌는데 원래 이 성은 둘레가 2,986척, 높이가 13척이었다 한다.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 耽羅志 》등에 보면 현청소재지로서의 관서(官署)들이 더러 드러나지만, 이제는 그 자취를 찾아볼 길 없고 주민들의 기억 속에 아련히 남겨졌을 뿐이다. 오늘날에도 전해지는 정의향교(旌義鄕校)의 대성전(大成殿)은 현청소재지가 고성리(古城里)에서 이곳 성읍리로 옮겨지는 해(1423)에 세워진 것이다. 이밖에 당시 고을로서의 실태를 살펴 볼 수 있는 기구(機構), 시설(施設)을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 耽羅志 》에서 간추리면, 창고(倉庫) ·향약(鄕約) ·사묘(祠廟) ·장관(將官) ·군병(軍兵) ·노비(奴婢) 등이다. 성읍리에는〈벅수머리〉또는〈무성목〉이라 불리는 돌하르방 12기가 있다. 제주목 (濟州牧) ·대정현(大靜縣)도 그렇지만 돌하르방이 원래 몇이었는지는 밝힐 길이 없으나 원래부터 12기라면 동 ·서 ·남문 각각 4기씩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이곳의 돌하르방은 거의가 원위치에 놓여 있는 셈이다. 무속신앙처(巫俗信仰處)가 20개소 가까이 산재했었는데 이중〈안할망당〉·〈광주부인당〉·〈일?당〉·〈개당〉은 아직도 남아있다. 주민의 신수와 건강을 관장한다는〈안할망당〉의 성격은 온 마을사람들이 신앙하는 ‘안칠성 ’이라 볼 수 있다. 부인병이나 모유 등을 관장한다는〈광주부인당〉에는 현감부인(縣監夫人)의 치병(治病)을 위하여 순사(殉死)했다는, 그의 시녀(侍女) 광주부인의 애틋한 이야기가 감돈다. 마소의 질병과 양육 등을 관장하는〈쉐당〉이 있었음은 유별난 일이다. 이 곳에서는 유식부락제(儒式部落祭)인 포제(포祭)가 아직도 행해진다. 그 제향(祭享)은 여느 마을과 비슷하지만 제향대상신(祭享對象神) 가운데〈목동신지위(牧童神之位)〉가 들어있는 것이 유다른데 농업과 더불어 축산업이 주민들의 주된 생업이라는 한 증거이다. 곧 제향대상신(祭享對象神)을 보면 상단(上壇)의 신은〈포신지위(포神之位)〉요, 하단(下壇)의 신(神)은〈제수주신지위(諸首住神之位)〉·〈염질신지위(染疾神之位)〉외에〈목동신지위(牧童神之位)〉가 있다. 이 마을에서는 민요가 가멸지게 전승된다. 산촌임과 더불어 5백년간의 도읍지라는 이중성격을 띠는 이 마을은 민요 또한 양면성을 전하기 때문이다. 곧 제주도의 어느 마을에서나 전해지는 민요에 성읍마을에서만 전승되는 민요가 접목되어 더욱 풍부하다. 또한 여느 마을보다도 걸궁이 성행했었는데 본디 성읍에 입주한 본토인들에 의하여 비롯되었었다고 한다. 유다른 가옥구조를 살펴볼 수 있음은 고을로서의 자취가 남겨졌다는 증거다. 이 마을 주민의 성씨분포는 강(康) ·김(金) ·이(李) ·홍(洪) ·고(高) ·송(宋) 등의 순서인데 비동족 마을이다. 7대 이상의 성씨가 별로 없다는 것은 이 마을이 지난날 행정요지(行政要地)여서 관헌과 주민의 전출입이 빈번했었다는 데도 그 까닭이 있는 것 같다. 교육 ·문화시설이나 주민의 학력은 도내 중산간마을로서 범상(凡常)한 편이다. 1914년 정의현의 도읍지에서 벗어난 이래, 성읍리의 이세(里勢)는 갑자기 기울어져 평범한 산촌으로 탈바꿈했고, 옛고을의 자취만이 몇몇 남겨졌을 따름이다.(출처 : 문화재청)

 

  성읍에는 시도민속문화재인 하르방, 시도민속문화재인 가옥, 천연기념물, 향교 등 다양한 문화재가 있다. 관심이 있으신분은 블로그내에서 검색해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남문

 

 

 

 

 

 

 

 

 

 

 

 

 

 

 

 

 

 

 

 

정의향교 근처에 있는 서문.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8,01880000,39&queryText=(`성읍민속`)<in>z_title&maxDocs=15000&docStart=1&docPage=10&canasse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