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유형문화재,기념물

제주 향사당(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6호)

천지연미소바위 2013. 5. 7. 16:43

  무과에 합격하지 못한 각 고을 무반(武班)들이 봄·가을 2차례 모임을 갖고 활쏘기와 잔치를 베풀며 여러 가지 일들을 의논하던 곳이다. 가락천 서쪽에 처음 지었던 것을 조선 숙종 17년(1691)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짓고 향사당(鄕射堂)이라 이름지었다. 그 뒤 정조 21년(1797)에 이름을 향사당(鄕社堂)이라고 고쳤다. 조선 전기에는 좌수의 처소로 쓰이다가 고종 16년(1879)에 신성여학교 자리로 이용하였다. 이 건물은 1981년에 동남향이던 방향을 동북향으로 바꾸어 다시 지은 것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향사당은 고을의 한량(閑良)들이 봄·가을 2회의 모임을 가지고 활쏘기와 잔치를 베풀며 당면(當面) 과제(課題)나 민심(民心)의 동향(動向)에 대하여 논하던 곳이다. 향사당은 애초에 가락천 서쪽에 지었던 것을 조선(朝鮮) 숙종(肅宗) 17년(1691) 절제사(節制使) 이우항(李宇恒)과 당시 판관(判官) 김동(金凍)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짓고 향사당(鄕射堂)이라 이름하였다. 정조(正祖) 21년(1797) 방어사(防禦使) 유사모(柳師模)는 그 이름을 향사당(鄕社堂)이라 고쳐 불렀다. 이 건물은 조선(朝鮮) 초기(初期)에 좌수(座首)의 처소로 쓰이다가 고종(高宗) 16년(1879)에는 신성여학교 교지(校地)로 이용되었다. 이 건물은 1981년에 다시 지었는데 이때 길가에 붙어 있어 동남향(東南向)이던 집 방향을 동북향(東北向)으로 바꾸었다. 양식은 한식일자(韓式一字) 팔작지붕과 5고주 7량이며 툇칸과 내진주(內陣柱) 사이에 우물마루가 있고 바닥은 강회다짐을 하였다. 기둥은 민흘림, 기단(基壇)은 현무암(玄武巖) 자연석을 이용하였다.(출처 : 문화재청)

 

 

문이 잡겨있어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멀리서만 보았네요.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1,00060000,39&fla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