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광주/명승, 사적

완도 청해진 유적(사적308호)1

천지연미소바위 2013. 9. 13. 21:45

청해진 유적은 장도와 장보고기념관 근처에 있다. 

 

 

 

멀리 보이는 섬이 장도. 장도에 가려면 비좁은 마을길로 가야한다. 장보고기념관쪽으로 가면 좋다.

 

 

 

간조라 바닷물이 빠져나가 갯벌로 걸어갔다.

 

 

 

 

 

 

 

 

 

 

 

 

 

 

 

 

 

 

 

 

 

완도관광정보센터 앞이다. 완도 청해진 유적에 가는 안내판이 있다. 이곳으로 가면 길이 좋다.

 

 

이어서 완도 청해진 유적2(http://blog.daum.net/dbsqkqh/4348)

 

 

  청해진은 신라 흥덕왕 3년(828) 장보고가 설치한 해군기지이자 무역기지로, 전라남도 완도 앞바다의 작은섬인 장도에 있다. 당시 이곳은 신라와 당,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장보고(?∼846)는 평민 출신으로 당나라에 건너가 장군이 되었으나, 해적들이 신라사람들을 노예로 삼는 것에 분개하여 신라에 돌아와 왕의 허락을 받고 828년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청해진은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하여 번영을 누리며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후 장보고는 왕위계승과 관련된 권력다툼에 휘말려 자객 염장에 의해 846년 암살당하였고, 문성왕 13년(851)에 청해진은 폐쇄되었다. 장도는 섬 전체가 계단식 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앞바다를 제외한 주변바다는 수심이 얕아 방어용 목책을 박아 외부접근을 막도록 만들었다. 성터 안에는 토기와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고, 인근에 장보고가 지었다는 법화사터가 남아있다. 청해진은 신라 후기 장보고가 서남해안의 해적을 소탕하고, 중국의 산동지방과 일본을 연결한 해상 교역로의 본거지로서 중요한 역사적 유적이다.

※(청해진유적 → 완도 청해진 유적)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이 장도(將島)는 신라(新羅) 제(第)42대(代) 흥덕왕(興德王) 3년(年)(A. D. 828)에 중국(中國)에서 귀국(歸國)한 장보고(張保皐)( ? ∼846)가 왕(王)에게 직접(直接) 중국해적(中國海賊)의 소탕(掃蕩)을 청(請)해 군사(軍士) 일만명(一萬名)으로써 설치(設置)한 청해진(淸海鎭) 자리이다. 당시 중국해적(中國海賊)들이 신라(新羅)사람들을 잡아가 도처(到處)에서 노비(奴婢)로 삼고 있었는데 이를 목격(目擊)하고 돌아온 장보고(張保皐)는 이후(以後) 청해진(淸海鎭) 대사(大使)로 해적(海賊)을 일소(一掃)해 해상(海上)을 말끔히 하고(청해(淸海)), 나아가 전통적(傳統的)으로 발달(發達)되어 있던 우리의 조선술(造船術)과 항해술(航海術)을 바탕으로 하여 멀리 중국(中國)의 동해안(東海岸)은 물론(勿論) 남해안(南海岸)과 일본(日本)의 해안(海岸)까지 왕래(往來)(항해(航海)) 교역(交易)하면서 일대해상왕국(一大海上王國)을 이루어 크게 웅비(雄飛)하였다. 넓은 황해(黃海)를 무대(舞臺)로 해상권(海上權)과 무역권(貿易權)을 독점(獨占)해 신라인(新羅人)의 거류(居留) 및 교역중심지(交易中心地)인 신라방(新羅坊)과 신라인(新羅人) 사원(寺院)인 신라원(新羅院)을 여러 곳에 세웠고, 당시 중국(中國)에 내왕(來往)한 서역상인(西域商人)들과도 교역(交易)하였으며, 다시 아직 황해횡단(黃海橫斷)의 항해능력(航海能力)이 없던 일인승려(日人僧侶)나 상인(商人)의 왕래(往來)를 돕기도 하였다. 현(現) 산동성(山東省) 문등현(文登縣) 청령향(淸寧鄕) 적산촌(赤山村)에 있던 신라방(新羅坊)(적산방(赤山坊) 및 그곳 신라원(新羅院)(법화원(法華院))의 존재(存在)와 불법(佛法)을 배우려 당(唐)나라에 갔던 (입당구법순례(入唐求法巡禮)) 일인(日人) 승려(僧侶) 원인(圓仁)의 귀국(歸國)을 도와 준 사실(事實) 등은 당시의 성황(盛況)을 전(傳)해 주는 대표적(代表的) 사례(事例)이다. 이 장도(將島)는 야산(野山)을 형성(形成)한 조그만 섬(면적(面積) 약(約) 3만여평(萬餘坪), 해발(海拔) 30m)으로 가장 가까운 지점(地點)에서 완도(莞島)(육지(陸地))와 170m 쯤 떨어져 있는데, 간조(干潮)때는 바로 육지(陸地)로 연결(連結)되고 만조시(滿潮時)에도 1.5∼2m 정도의 수심(水深) 밖에 되지 않는다. 1982년(年) 이래(以來) 수차(數次)에 걸친 조사(調査)를 통해 이곳 장도(將島)에는 현재(現在)

 1.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의 흔적(痕跡)이 남아 있는데 외성(外城)은 진흙과 잔 자갈을 다져 쌓았고(판축(版築)) 내성(內城)은 지형(地形)에 따라 단(段)을 이루며 돌로 쌓았으며,

 2. 성내(城內)에 삼국시대(三國時代)로부터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이르는 와당편(瓦當片) 토기편(土器片) 자기편(磁器片) 등이 널리 산재(散在)해 있고,

 3. 정상(頂上)에 많은 군사(軍士)를 수용(收容)할만한 평탄(平坦)한 공간(空間)이 있고 그 한가운데 사당(祠堂)과 오래된 맷돌의 아랫돌이 현존(現存)하며,

 4. 수심(水深)이 얕은 남서(南西)쪽 해변(海邊)에 약(約) 10m 떨어져 당시 수채(水寨)(해안경비초소(海岸警備哨所)) 설치(設置)의 유구(遺構)로 보이는 지름 20∼30cm의 나무말뚝(상부(上部))은 절단(切斷)되어 없어졌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청해진(淸海鎭)은 신라(新羅) 해로(海路)의 요충(要衝)인데 지금 완도(莞島)라 한다"고 한데 비추어 우선 지리상(地理上) 예로부터 남(南)으로 제주(濟州), 동(東)으로 여수(麗水) 부산(釜山), 서북(西北)으로 목포(木浦)로 내왕(來往)하는 요충지(要衝地)인 위에, 이곳 외(外) 완도(莞島)에서 청해진(淸海鎭) 자리로 비정(比定)할만한 유적(遺跡)이 없는 점(點) 등을 종합(綜合)하여 장도(將島)를 청해진(淸海鎭) 자리로 확인(確認)하기에 이르렀고, 1984년(年) 9월(月) 1일(日)에는 사적(史蹟) 제(第)308호(號)로 지정(指定)하였다. 한편 대안(對岸)의 완도읍(莞島邑) 상왕산(象王山) 남록(南麓)에 당시의 사찰(寺刹)로 추정(推定)되는 법화사(法華寺)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법화암(法華菴))의 유지(遺址)가 5단(段)의 층단(層段)을 이루며 밭으로 남아 있다. 이는 상기(上記) 중국(中國) 산동성(山東省) 적산촌(赤山村)의 법화원(法華院)과도 어떤 맥락(脈絡)이 닿는, 바꾸어 말해 다같이 장보고(張保皐)와 밀접(密接)히 연관(聯關)되는 사찰지(寺刹址)로서 주목(注目)된다. 이밖에 구전(口傳)으로 지금 완도읍(莞島邑) 죽청리(竹靑里)에 있는 '한들'이 청해진(淸海鎭) 당시 일만(一萬)의 군사(軍士)를 훈련(訓練)시키던 곳이라 전(傳)하기도 한다. 장보고(張保皐)(혹은 궁복(弓福))는 어려서, 특히 해저수영(海底水泳)에 뛰어났던 친우(親友)(혹은 정연(鄭連)과 함께 중국(中國)에 들어가 서주(徐州)의 무녕군(武寧軍) 중소장(中小將)이 되어 무용(武勇)을 떨치다가 상기(上記)와 같이 흥덕왕(興德王) 3년(年)에 돌아와 청해진(淸海鎭)을 설치(設置)하였다. 장보고(張保皐)는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로 크게 세(勢)를 굳히고 성(盛)히 활약(活躍)하던 중(中), 흥덕왕(興德王) 사후(死後) 착잡(錯雜)하던 왕위쟁탈전(王位爭奪戰)에서 패사(敗死)한 김균정(金均貞)의 자(子) 우징(祐徵)이 당시의 서울 경주(慶州)에서 청해진(淸海鎭)으로 내려와 의탁(依託)하자 그를 보호(保護)하였고, 이어 우징(祐徵)의 청(請)으로 군(軍)을 일으켜 정년(鄭年)으로 하여금 나아가 전왕(前王)을 시해(弑害)한 제(第)44대왕(代王) 민애왕(閔哀王)(김명(金明))을 죽이고 우징(祐徵)을 왕(王)으로 옹립(擁立)하는데 성공(成功)하였다(제(第)45대왕(代王) 신무왕(神武王) A.D.839). 이에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승서(陞敍)되고 식호(食戶) 2,000을 봉(封)해 받았으며, 곧 별세(別世)한 신무왕(神武王)의 자(子) 문성왕(文聖王)이 즉위(卽位)하자 다시 '진해장군(鎭海將軍)'을 배임(拜任)하는 등 융숭(隆崇)하게 예우(禮遇)받았다. 그러나 동왕(同王7년(年)(845) 3월(月)에 이르러 왕(王)은 그의 딸을 차비(次妃)로 맞아들이려 하였지만 해도인(海島人)의 딸은 왕비(王妃)로 적합(適合)치 않다는 신하(臣下)들의 반대(反對)로 이루어지지 않자 그는 왕(王)을 크게 원망(怨望)하였다. 익년(翌年)(846) 봄에 청해진(淸海鎭)을 근거(根據)로 반란(叛亂)을 일으켰으나 장(張)의 살해(殺害)를 왕(王)에게 자청(自請)하고 찾아온 자객(刺客) 무주인(武州人) 염장(閻長)에게 속임당하여 살해(殺害)되고 말았다. 동왕(同王)13(年)(851) 2월(月)에는 마침내 청해진(淸海鎭)마저 혁파(革罷)되고 그곳 사람들은 벽골군(碧骨郡)으로 옮겨졌다 한다.(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3,03080000,36&fla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