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인천/유형문화재,기념물

군포 이기조선생 묘(경기도 기념물121호)

천지연미소바위 2011. 6. 2. 09:53

조선 중기의 문신 호암 이기조(1595∼1653) 선생의 묘소이다. 광해군 7년(1615)에 병과로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웠고, 인조 13년(1635)에 경상도 관찰사를 지낼 때는 많은 덕을 쌓아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묘지는 부인 고령 신씨와의 합장묘이며 봉분 앞에는 향로석과 제물을 차려 놓기 위한 상석이 있고, 좌우로는 동자상· 문인석·망주석이 1쌍씩 있다. 묘역 앞에는 숙종 31년(1705)에 세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박세채가 글을 지은 것이다. 1992년에 이장할 때 발견된 묘지석(墓地石)의 내용에 의해 원래의 묘역을 영조 4년(1728)에 이장하여 만들었음을 확인하였다. 조선 인조(仁祖)·효종(孝宗) 때의 문신으로 활약한 이기조(1595∼1653)를 모신 유택이다. 봉분은 단분이며 부인 고령신씨(高靈申氏)와의 합장묘이다. 봉분 앞에 상석·향로석이 있으며 상석을 중심으로 전방에 좌우로 동자상·망주석·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묘역 앞에는 박세채(朴世采)가 찬(撰)하여 숙종(肅宗) 31년(1705)에 건립한 신도비가 있다. 이 묘역은 원래 산본동 산16에 위치하였으나 산본 지역의 택지 개발로 인하여 1992년 현 위치로 이장(移葬)하게 되었다. 이장 직전에 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발굴이 이루어졌다. 발굴 조사 결과 봉분은 전면과 좌우면이 장대석을 이용한 호석(護石)으로 둘러져 있었고, 봉분 좌측 가장자리 호석 바깥쪽에서 청화백자(靑畵白磁)로 만든 직사각형 판형(板形)의 묘지석(墓誌石) 14매(枚)가 출토되었고, 내부 구조는 회벽(灰壁)을 2칸으로 구축한 다음 그 안에 각각 목관(木棺)을 안치한 회곽묘(灰槨墓)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묘지석의 내용을 통하여 원래의 묘역이 영조(英祖) 4년(1728)에 이장되어 조성된 것이 확인되었는데 이 묘역의 시대는 이것을 기준한 것이다. 이기조는 광해군(光海君) 7년(1615) 진사로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형조좌랑(刑曹佐郞)에 기용되어 병조참의(兵曹參議)·공주목사(牧使) 등을 거쳐 경상도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며 많은 치적을 쌓아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이어 대사간(大司諫)·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고 인조 23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지나친 세공미(歲貢米)의 부담을 감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랐으나 김육(金堉) 등의 탄핵으로 함경감사(監司)로 밀려났다가 효종 4년(1653) 공조판서에 임명되어 돌아오던 중 김화에서 병사하였다.(출처 : 문화재청)

 

 

 

 

 

묘 앞에 있는 비가 앞으로 기울고 있네요

 

 

 

군포 도장중학교 건너편에 있는 철쭉동산

 

철쭉동산에서 본 도장중학교. 승진하기 전 3년동안 근무했었고, 마지막해에 김연아를 1년동안 지도했던 곳. 그땐 아이들로부터 왕아빠로 불리웠는데. 현재는 모두가 멋진 대학생이 되어있겠지...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3,01210000,31&queryText=((V_KDCD=23)) <and>(((V_NO >=121)<and>(V_NO <=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