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내면 주암리에서 345도로를 타고 북내체육공원쪽으로 가는 중이다. 체육공원 가기 전에 장암리 방향으로 좌회전 한다.
안내판이 보인다. 그러나 어느 길로 가던지 나중에 합쳐진다.
사당인 소산사이다.
원경렴 신도비가 보인다.
원경렴 신도비이다.
원유남 가계도
12세-원팽조 : 충청도병마절도사
13세-원송수 : 첨지중추부사, 아들 원량, 원호
14세-원호 : 경기 강원방어사, 여주목사 충장공(http://blog.daum.net/dbsqkqh/5143)
15세-원유남 : 지중추부사(http://blog.daum.net/dbsqkqh/5142), 아들 원두표, 원두추
16세-원두표 : 좌의정, 원평부원군(http://blog.daum.net/dbsqkqh/5143), 충익공, 아들 원만석, 원만리(원두추에게 양자), 원만춘
17세-원만석 : 황해도관찰사, 아들 원몽은(생부 원만춘)→손자 대호군 원명철→증손자 원흥군 원경렴
17세-원만춘 : 아들 원몽헌, 원몽은(원만석에게 양자감)
16세-원두추 : 광주목사, 맏사위 동국18현 박세채, 아들 원만리(생부 원두표)
17세-원만리(생부 원두표) : 평안도관찰사, 아들 원몽린, 원몽익, 원몽양
18세-원몽린 : 효종의 부마(http://blog.daum.net/dbsqkqh/5127), 부인 효종의 여섯째 딸인 숙경공주, 흥평공, 효헌공, 아들 원명구(양자 옴)
19세-원명구 : 황주목사, 아들 원경하, 원경유, 원경여
20세-원경하 : 이조판서 충문공, 아들 원인손, 원의손, 원계손
21세-원인손 : 우의정
원세교의 아들 원병상 묘
원세교의 묘이다.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좌의정 원두표의 8세손이자 영릉참봉 원유증(元有曾, 1738~1780)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영동현감 원석현이다. 동지돈령부사를 지냈으며 원춘군(原春君)에 봉해졌다
영동현감 원석현(元錫玄, 1773~1822)의 묘이다.
원경렴 묘이다. 조선 영조대의 문신으로 자는 도원(道源), 호는 소재(疎齋)이다. 대호군 원명설(元命卨)의 아들이다. 북도병사와 경기수사를 거쳐 병조참판에 이르렀으며 원흥군(原興君)에 봉해졌다.
원만석 묘이다. 동래부사, 황해도관찰사를 지냈고 좌의정 원두표의 아들이다. 뒤에 원유남 묘가 있고 앞에는 원경렴 묘가 있다. 아래부터 원병상-원세교-원석현-원경렴-원만석-원유남 묘이다. 묘역은 덕암교회 및 장암1리마을회관 뒷편에 있다. 원유남의 아버지인 원호장군 묘와 아들인 원두표의 묘(http://blog.daum.net/dbsqkqh/5143)는 동쪽으로 150여m 떨어진 곳에 있다.
맨 위에 있는 원유남선생의 묘이다.
원유남(1561~1631)은 인조대의 무신으로 본관은 원주, 자는 관보(寬甫)이며 충장공 원호의 아들이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이어 1586년 무과중시에도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권율(權慄, 1537~1599)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고 1596년 강원·충청 등의 조방장(助防將)을 지냈다. 또 이듬해 정유왜란이 일어나자 분의복수군(奮義復讐軍)의 장령(將領)으로 활약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녹훈되고 원계군(原溪君)에 봉해졌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되어 윤방(尹昉, 1563~1640)과 더불어 도성을 방어하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묘는 장암리 아랫말의 소산사(蘇山祠) 뒤쪽에 위치한 원주원씨세장지 내에 위치한다. 묘역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의 옛 석물이 간소하게 갖추어져 있다. 향로석에는 당초문(唐草紋)과 운족(雲足)을 조각하고, 망주석의 상단에는 운각(雲角)과 염우(廉隅)를 장식하였다. 봉분 앞에 방부개석 양식의 묘표가 건립되어 있다. 백대리석 비신의 위쪽 폭이 아래쪽보다 넓어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다. 팔작지붕의 개석과 복련이 새겨진 방부는 화강암으로 조성하였다. 비신의 앞면에 큰 해서로 “유명조선(有明朝鮮) 정사공신(靖社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원계군(原溪君) 증우의정(贈右議政) 시충숙(諡忠肅) 원공휘유남묘(元公諱裕男墓) 정경부인(貞敬夫人) 상당한씨(上黨韓氏) 부전(祔前)”이라고 하여 피장자의 신원을 밝히고 있다. 묘표음기는 비신의 뒷면과 좌측면에만 각자하였으나 표제와 찬서자는 기록하지 않았다.
명부전과 조사당 사이 서편 언덕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두 기의 석조부도(石造浮屠) 중 원구형 부도이다. 이 원구형 탑신(塔身)의 부도는 간략하고 폭이 좁은 기단, 도식적인 연화문 등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연주문 받침 위에 보주를 두른 삼단형으로 구성된 상륜부가 있다. 상륜부 아래 지붕에는 연잎을 얹어 표현하였다.
기와골은 선명하게 나타내고 4개는 번갈아가며 용머리를 표현하였다. 사각의 지대석 위에 중대석과 상대석을 마련한 기단부는 조각이 둔중하다. 편평한 상대석 위에는 형식적인 연꽃을 모각하였다. 팔각의 중대석에는 2단으로 나누어 연주문형 기둥을 마련하였다.(출처 : 여주시청)
여주시청 : http://www.yj21.net/culture/content/view/1/menu/1815?contentIdx=44&listUrl=/cms/content/view/1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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