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인천/유형문화재,기념물

화성 백천장선생묘(경기도기념물86호)

천지연미소바위 2011. 8. 12. 07:01

  고려시대 문신이었던 백천장 선생의 묘이다. 고려말 진사로 문과에 급제한 후 정당문학 등을 역임하고 원나라로 유학을 가서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나이가 들어 귀국한 뒤 수성백(隨城伯)에 봉해져 재상을 지냈다. 그의 묘는 최근 새롭게 단장하여 고려 후기 무덤 양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 순조 13년(1813)에 세운 묘비와 그 즈음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장명등과 문인석이 있다. 묘역의 오른쪽 북쪽으로 약 50m 지점에 수원 백씨 시조의 사당이 있고, 묘역의 진입로에 1975년에 세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근처 길가에 세우던 비)가 있다. 조선 정조 때 사도세자의 능을 이 근처로 옮기면서 세자의 능에서 10리 이내의 산소는 모두 이장하게 했으나, 그의 묘소는 조정에서 그대로 보존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고려시대(高麗時代) 문신(文臣)이었던 백천장 선생의 묘이다. 선생은 수원백씨(水原白氏)의 시조인 송계공(松溪公) 우경(宇經)의 후손(後孫)이다. 진사(進士)로 문과(文科) 등과(登科) 후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으며 원(元)나라에 유학, 국자진사(國子進士) 한림학사(翰林學士) 좌복야사공대사도(左僕射司空大司徒) 우승상(右承相)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를 역임했고 연로(年老)하여 귀국(歸國)후 수성백(隨城伯)에 봉(封)했고 그후 수원에 거주하다 85세에 졸(卒)하였다. 부음(訃音)을 들은 고려(高麗) 충선왕(忠宣王)이 심히 애도하여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하고 시호(諡號)를 문익(文益)이라 하였다. 조선(朝鮮) 정조(正祖)때 사도세자릉(思悼世子陵)을 화산(華山)으로 옮길 때 10리 이내 민가(民家)의 산소(山所)는 이장(移葬)하게 했으나 선생의 묘는 국가(國家)에서 기(旗)를 나열삽입(羅列揷入)하여 그대로 보존하였다. 그후로 이곳 동명(洞名)을 기전동(旗田洞)으로 불러왔으며 선생의 묘도 천사릉(天使陵)으로 일컬어왔다.(출처 : 문화재청)

 

 

 화성 기안초등학교에서 북쪽으로 약400m 쯤에 있는데, 좀더 가까이 가보고 싶었지만 출입 금지 표지판과 함께 출입문이 잠겨 있어....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3,00860000,31&queryText=((V_KDCD=23)) <and>(((V_NO >=86)<and>(V_NO <= 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