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조선 선조 38년(1605)과 광해군 6년(1614)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그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13년(1621)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광해군 13년(1621)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네 모서리기둥 윗부분에는 사람 모습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것은 공사를 맡았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모의 모습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데, 재물을 잃은 목수가 주모의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3곳의 처마 밑에서는 두손으로 처마를 받치며 벌을 받고 있는 모양새인데 비해, 한 귀퉁이의 것은 한 손으로만 처마를 받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벌을 받으면서도 꾀를 부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 선조들의 재치와 익살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의 능숙한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고,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대웅전은 1916년 수리시 발견된 양간록(樑間錄)에 의하면 선조(宣祖) 38년(1605) 일부 불탔으며, 다시 광해군(光海君) 6년(1614)에 불이나 모두 타버림으로써, 다음해(1615) 공사를 시작하여 광해군 13년(1621)에 거의 완공을 본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에는 철종(哲宗) 6년(1855) 규영화주(奎塋化主)에 의해 중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팔작집으로 막돌 허튼층쌓기한 높은 기단(基壇)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민흘림 두리 기둥을 세워,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짜올린 다포식(多包式) 건축이다. 공포의 짜임은 외2출목(外二出目) 내4출목(內四出目)으로 되었고, 쇠서(牛舌)의 모양은 섬약하며, 귀공포에는 나무로 깎은 인물상(人物像)을 얹어 놓은 것이 특이하다. 내공포의 공간포(空間包)는 첨차(첨遮)가 교두형(翹頭形)이나 주상(柱上)에서는 초각(草刻)된 판형(板形)으로 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출처 : 문화재청)
대웅전 네 곳에 있는 여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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