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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금남 남산영당(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72호,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7호)

천지연미소바위 2012. 3. 3. 13:19

  남이웅(1575∼1648)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광무 10년(1906) 유림들이 세웠다. 조선 선조, 광해군, 인조 때 정치가였던 선생은 평소 법을 준수하고 사치를 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광해군 5년(1613)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병조좌당 등 여러 벼슬을 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는 소현세자가 중국 심양으로 잡혀갈 때 극진히 모시고 따가갔다와 후에 춘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인조 16년(1638) 대사헌이 된 후 법을 철저하게 집행하였으며, 미신을 없애려고 무당을 박해하기도 하였다. 사당 뒤쪽으로 선생의 묘소와 묘비가 있다.(출처 : 문화재청)---맞춤법이...

 

지금은 세종특별자치시로 편입되어 이름도 금남 남산영당으로 되었다.

 

 

 

 

 

 

  두번째 화살표에서 우회전하면 되는데 내비가 직진하라고 해서 멀리 시계방향으로 돌아 가는 바람에 남산영당 뒷편에 있는 오솔길로 가느라 힘이 들었다. 아래 지도에서 첫번째 화살표가 있는 교차로는 반포면사무소에서 북쪽으로 1km 정도 거리이다.

 

 

  저멀리 보이는 길로 조금만 올라 가면 남산영당이 있다.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31,00720000,34&queryText=((V_KDCD=31))%20<and>(((V_NO%20>=72)<and>(V_NO%20<=%2072)))

 

 

현재는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7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2&VdkVgwKey=31,00070000,45&queryText=

  남이웅(1575∼1648)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광무 10년(1906) 유림들이 세웠다. 조선 선조, 광해군, 인조 때 정치가였던 선생은 평소 법을 준수하고 사치를 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광해군 5년(1613)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병조좌당 등 여러 벼슬을 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는 소현세자가 중국 심양으로 잡혀갈 때 극진히 모시고 따가갔다와 후에 춘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인조 16년(1638) 대사헌이 된 후 법을 철저하게 집행하였으며, 미신을 없애려고 무당을 박해하기도 하였다. 사당 뒤쪽으로 선생의 묘소와 묘비가 있다. 이 영당(影堂)은 의령 남씨 문종의 종가 사당(祠堂)에 모셔져 있던 남이웅((南以雄), 1575∼1648) 선생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1906년에 유림들이 창건했다. 선생은 선조(先祖), 광해군(光海君), 인조(仁祖) 때의 정치가였다. 선조 39년(1606)에 진사에 합격한 이후 여러 벼슬을 하였는데, 이괄(李适)의 난 때 공을 세워 춘성군에 봉해지고,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에 볼모로 잡혀갈 때 동행하였다. 1638년 대사헌(大詞憲)이 되어 법을 엄격히 집행하였고 미신을 없애려고 무당을 박해하였다. 평소 예법을 소중히 알고 법제를 준수하여 사치를 억제하였다. 영당 뒷편에 선생의 묘소 및 현종 9년(1658)에 건립한 묘비가 있다.(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