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광주/유형문화재,기념물

순천 낙안객사(낙안지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170호)

천지연미소바위 2011. 5. 16. 19:23

조선시대 건물로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 예를 올리고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하던 건물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군수 이인이 세종 32년(1450)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고『승주문헌집』에 인조 9년(1631)과 철종 8년(1857)에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객사 중심 건물만 남아 있었는데 1909년 이후 낙안초등학교 건물로 사용하다가 1982년 수리하였다. 총 앞면 7칸·옆면 3칸 규모로 앞면 3칸짜리 건물을 중심으로 부속 건물이 대칭으로 붙어 있는 구성을 이루고 있다. 지붕은 본 건물은 앞뒤로 간략하게 맞댄 맞배지붕을 갖추고 있는 반면, 부속 건물은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여덟 팔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앞면에 연봉오리와 연꽃 모양으로 장식해 놓았지만 부속 건물에는 모두 잘라 간소하게 꾸몄다. 한편 본 건물에 전패를 두었으나 학교 건물로 사용하면서 전패 봉안처는 없어졌다. 안쪽은 천장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객사에 맞는 색상과 문양은 잘 남아있는 편이다. 특히 용 몸 모양의 대들보 양 끝에 남아있는 문양은 옛 법식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본래 있던 주변 건물들은 없어졌지만 대체로 일반적인 객사의 양식을 갖춘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낙안 객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세종 32년(1450) 군수 이인이 건립하였다 하였을 뿐 그 규모 등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다. 또한 『승주문헌집』에 있는 낙안객사의 상량문에 의하면 인조 9년(1631) 당시 군수 정원필이 수리하였고, 철종 8년(1857) 군수 이명칠이 수리하였던 기록으로 보아 두 번의 중수를 거쳤고 1982년 10월에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낙안 객사는 현재 객사 본전만 남아 있어 3문의 규모를 알 수 없으나 이들은 1900대 초까지 있었다. 객사 본전은 1909년 이후로는 낙안초등학교 교사로 사용되어 내외부에 변조된 부분이 많았으나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객사의 좌향은 남향으로 본사의 중앙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익사가 연결되어 있다. 본 객사는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완벽한 좌우대칭으로 되어 있다. 기단은 전면에 5단의 축대를 허튼층으로 쌓고 양측면과 후면은 객사와 같은 높이로 외벌대로 둘러져 있다. 비교적 큰 자연석 덤벙 주춧돌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로는 주두를 얹고 창방을 걸었으며 창방과 주심도리의 장혀 사이에는 소로를 두었다. 특히 전면 기둥 위로는 연꽃 모양이 조각된 2익공을 두고 내부는 외부의 소 혀모양과 같은 모양으로 돌출되거나 일부는 보아지로 대들보를 받게하였다. 대들보는 둥글게 다듬은 통보로 위에 동자주를 놓고 종종보를 얹은 다음 파련대공을 두어 종도리를 받게 한 5량구조로 되어 있다. 익사는 전면을 2칸으로 하여 본사에 연결된 1칸은 내고주를 세워 종보를 받게 하였다. 본사와 익사는 지붕의 높이와 익공, 장식의 유무로 격을 달리한 산형의 고설집으로 본사의 장혀가 연장되어 도리와 맞이음 되도록 하여 각각 지붕의 높이를 조절하였다. 지붕은 본사의 경우 맞배지붕이고 양익사는 팔작지붕을 얹었다.(출처 : 문화재청)

 

 

 

 *낙안지관이라는 현판이 보이네요. 그리고 문화재 안내판의 글씨가 잘 안보이네요.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1,01700000,36&queryText=((V_KDCD=21))%20<and>(((V_NO%20>=170)<and>(V_NO%20<=%20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