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사적, 명승

제주목 관아(사적380호)

천지연미소바위 2013. 5. 7. 16:36

조선시대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던 제주목 관아는 지금의 제주 관덕정(보물 제322호)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 주요 관아시설이 자리하였던 곳으로 탐라국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관아시설은 1434년(세종 16) 관부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진 뒤 바로 역사를 시작하여 그 다음해인 1435년에 골격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내내 증·개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주목 관아는 일제강점기 때 집중적으로 훼철되어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에 제주시에서는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문화층과 함께 제주목 관아의 주요시설이었던 동헌·내아 건물터 등의 위치와 규모를 확인하였다. 1993년 3월 30일에 제주목 관아지 일대가 사적 제380호로 지정되었고,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초석·기단석 등을 토대로 하고,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와 『탐라방영총람(耽羅防營總攬)』 등 당의 문헌 및 중앙문화재위원·향토사학가·전문가 등의 고증과 자문을 거쳐 지난 2002년 12월 복원공사를 완료하여 제주 고유의 역사적 숨결을 전해주고 있는 장소이다.

  ○ 외대문(外大門) : 제주목 관아 건물로 통하는 영문의 대문루

외대문은 문헌에 ‘진해루(鎭海樓)’, ‘탐라포정사(耽羅布政司)’ 로 표기되어 있다. 관아의 관문으로 1435년 홍화각(弘化閣) 창건시에 건립했다고 전하며, 1699년 남지훈(南至薰) 목사가 개건했다고 한다. 2층 누각 건물로 종루(鐘樓)로도 활용되었다.

  ○ 연희각(延曦閣) : 제주목사의 집무처

연희각은 목사가 집무하던 곳으로 상아(上衙)의 동헌(東軒), 목사의 정아(正衙) 등으로 불리웠다. 상아라 한 것은 판관(判官)의 집무처인 이아(二衙)와 구분해 명명된 것이다. 이원조(李源祚) 목사의 『연희각기(延曦閣記)』에 의하면“연희각은 예전에 기문(記文)이 없어서 건치(建置) 연월일을 상세히 알 수가 없다. 현판도 누가 명명하고 누가 쓴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건물은 겹처마에 깊숙한 지붕으로 좌대(座臺) 위에 높게 지어져 있다. 그 이름을 연희(延曦)라고 한 것은 외신(外臣)이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홍화각(弘化閣) : 절제사의 영청으로 사용하던 공간

홍화각은 예전에 절제사가 사무를 보던 곳이다. 1435년(세종 17) 최해산(崔海山) 안무사가 창건한 뒤 1648년(인조 26)에 김여수(金汝水) 목사가 중수하였으며, 1713년(숙종 39)에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되어 별도로 정아(正衙)를 설치함에 따라 이 홍화각은 영리청(營吏廳)이 되었다. ‘홍화각’이라 명명한 것은 왕의 어진 덕화(德化)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또한 홍화각은 탐라고각(耽羅古閣)이라 불리었을 정도로 관아건물 중에서 뛰어난 건물이었다.

  ○ 우련당(友蓮堂)

우련당은 1526년(중종 21)에 이수동(李壽童) 목사가 성(城) 안에 우물이 없으면 적이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거나 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구급하기 어렵다 하여, 못을 파고 물을 가두어 연꽃을 심은 뒤 그 곳에 세웠던 정자이며 연회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그 뒤 영조(英祖) 때에는 김정 목사가 다시 정자를 중수하고 못 가운데 석대(石臺)를 쌓아서 꽃과 대나무를 심고 향의실(享儀室)이라 개명하여 공물(貢物)을 봉진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 영주협당(瀛洲協堂) : 목사를 보좌하는 군관들이 근무하던 관청

영주협당은 원래 군관(軍官)들이 근무하던 관청이었다.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예전의 군관청(軍官廳)이 영(營)·목(牧) 소속으로 분리될 때 영군관청(營軍官廳)이 되었다. 군관의 수는 원래 15인이었으나 효종(孝宗) 초기에 이경억(李慶億) 어사가 조정에 건의하여 10인으로 줄였다.

  ○ 귤림당(橘林堂) : 제주목사가 고즈넉한 여유를 만끽하는 장소

귤림당은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거나 시(詩)를 지으며 술을 마시는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1743년(영조 19) 안경운(安慶運) 목사가 개건하였고, 1769년(영조 45)에 다시 중수한 뒤 건물이 노후(老朽)하여 이원조 목사가 1842년(헌종 8)에 다시 중수하였다.

  ○ 망경루(望京樓) : 임금님의 은덕을 기리는 공간인 동시에 제주 앞바다로 침범하는 왜구를 감시하는 망루 역할 망경루는 북두성(北斗星)을 의지하여 임금님이 있는 서울을 바라보며 그 은덕(恩德)을 기리는 신지(信地)이며 중요한 제주목관아의 하나였다. 1556년(명종 11) 김수문(金秀文) 목사가 창건한 뒤 1668년(현종 9) 이인(李土寅 ) 목사가 개건하였고, 1806년(순조 6)에는 박종주(朴宗柱) 목사가 중수하였다.

  ○ 회랑(回廊) :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복도의 성격을 지닌 공간

회랑은 정당(正堂)의 좌우(左右)에 있는 긴 집채를 말한다. 원래는 칸마다 벽체를 둘러 방으로 또는 다른 용도의 기능을 했을 것이나 지금은 개방형으로 복원되었다.

  ○ 중대문(中大門) : 관아내의 출입구

중대문 동헌(東軒)으로 통하는 외대문과 내대문의 중간에 있었던 대문이다.

※(제주목관아 → 제주목 관아)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제주목 관아지는 조선 숙종 29년(1703)에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이 제주도의 방어·군민·풍속 등을 친히 살피면서 순력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과 설명집인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나 고득종(高得宗)의 홍화각기(弘化閣記)(세종 17년, 1435) 등 많은 문헌기록을 통해서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으며 발굴조사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에 이르는 여러 문화층과 함께 제주목 관아의 주요시설이었던 동헌(東軒)·내아(內衙) 건물지 등의 위치와 규모를 확인함으로써, 이 곳이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주도의 중심지 역할을 한 중요한 유적지였음이 밝혀져, 유적지 남서편의 관덕정(觀德亭)(보물 제322호:'59.3.9 지정)을 포함하여 사적으로 지정·보존하게 된 것이다. 관덕정은 정면 5칸, 측면4칸의 이익공(李翼拱) 집으로서 처마가 긴 것이 특징인데, 조선 세종 30년(1448)에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창건되어 그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 제주시의 명물이다.(출처 : 문화재청)

 

 

 

옆에는 보물322호인 관덕정이 있다.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3,03800000,39&queryText=((V_KDCD=13))%20<and>(((V_NO%20>=380)<and>(V_NO%20<=%20380)))&maxDocs=15000&docStart=1&docPage=10&canasse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