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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향교지(강원도 기념물87호)

천지연미소바위 2013. 6. 16. 14:08

철원에는 향교와 관련된 곳이 3군데 있다.

1. 철원 향교지(강원도 기념물87호, http://blog.daum.net/dbsqkqh/4132)

2. 새로지은 철원향교(http://blog.daum.net/dbsqkqh/4133)

3. 구 철원향교(카페 연, http://blog.daum.net/dbsqkqh/4130)

 

 

 

 

 

 

 

 

 

 

 

○ 철원향교는 철원군 철원읍 월하리 현 위치에 조선시대 초기에 건립되어 6.25때까지 존속해 있으면서 철원지방 정신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던 곳으로, 향교지 아래층 유적과 주변 토성 등 성격이 파악되지 않았으나 훼손의 우려가 있으므로 우선 지정하여 보호하고 추후 조사하여 유적의 성격을 명확히 규명하고자 함.

○ 철원향교의 창건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세종 6년(1424)에 경기도의 철원·삭녕 등지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향교 생도들을 햇곡이 나기까지 방학시키고, 교관들도 집으로 돌아갈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다른 지역의 향교와 마찬가지로 적어도 조선왕조 초창기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ꡔ(신증)동국여지승람ꡕ에 간략히 나타나는 것 이외에는 철원향교에 대한 조선전기의 특별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철원향교에서 발간한 ꡔ철원향교지ꡕ(1997)에 의하면 선조 원년(1568) 철원 유림들에 의해 철원향교가 건립되었다고 하나 어떤 근거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후에 白軒 李景奭이 쓴 「鐵原府鄕校重新記」에는 그러한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 한편 조선중기의 인물 백헌 이경석의 문집인 ꡔ白軒集ꡕ에는 1657년 향교를 중수하고 이경석이 철원부사인 조카의 부탁으로 記文을 작성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철원향교에 대한 몇가지 중요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그 내용을 종합해 보면, 철원향교는 임진왜란 당시 모두 소실되어 초옥 몇 칸을 지어 유지하다가 선조 37년(1604) 부사 趙仁徵이 기와로 다시 개수하였고, 이후 세월이 지나 퇴락한 것을 인조 7년(1629) 부사 金矱이 구건물을 그대로 수리하였다. 그후 철원향교는 심한 풍우로 피해를 입어 기둥이 기울고 墻壁이 붕괴되어 퇴락된 것을 효종 8년(1657) 다시 중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헌 이경석은 이 때 조카(李敏幸인 것으로 보임)가 철원부사로 있었는데 향교를 중수하고 기문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重新記를 쓰게 되었다.

○ 이 중신기에는 철원향교의 위치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철원부 남쪽 3리 되는 곳이 향교인데 산이 있어 북쪽으로부터 동남쪽으로 갈라지면서 봉우리를 이룬 것이 5개이다. 두 번째 봉우리 뒤, 세 번째 봉우리 앞에 위치한다. 가까이는 보개산에 揖하는 형세이고, 멀리는 넓은 들판으로 통하며, 긴 개천이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라고 하여 철원향교 위치와 관련하여 이전의 어느 기록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내용을 싣고 있다.

○ 또한 이 중신기에서는 향교 건물 전체의 규모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공사를 시작한지 수개월만에 聖殿 및 동·서 兩廡를 완성하였다고 하여 부분적인 건물 현황을 언급하고 있다. 아마 이 의미는 이 당시 중수공사가 대성전과 동·서 양무를 위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언급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그런데 ꡔ인조실록ꡕ을 보면 인조 10년(1632) 철원향교가 불탔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 철원향교 전체가 소실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향교가 화재를 당한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실록에 “철원의 향교가 못된 백성들에 의해 불탔다는 감사의 보고를 받고 이조가 부사를 파직시키라고 청하니 파직시키지 말고 惡習을 바로 잡으라고 명하였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철원향교의 화재는 사고가 아니라 고의적인 방화에 의한 화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로 본다면 1657년 철원향교를 중수하기 이전에 적어도 한번은 부분적일지라도 향교건물의 개수, 또는 중수가 있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 인조 15년(1637) 儒生 朴茂, 朴花를 비롯한 안경덕, 안경연, 임전, 임진영, 임홍중, 심운룡, 심전룡 등이 주선하여 향교를 중건하였다는 ꡔ철원군지ꡕ와 ꡔ철원향교지ꡕ의 내용이 어떤 기록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1632년 방화로 인해 피해를 입은 향교 중건 문제는 국가 전란의 위기속에서 미루어졌다가 병자호란후에 다시 중건 공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 이후 철원향교의 건물 중수나 이전 등과 관련된 중요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조선후기에 예조에서 작성한 ꡔ學校謄錄ꡕ에 의하면 1656년 철원향교에서는 東廡에 봉안되어 있던 염계 주돈이, 명도 정호의 位版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있었고, 1716년에는 東廡가 새로 개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ꡔ승정원일기ꡕ의 기록으로 보아 1871년경 대성전을 개수한 것을 알 수 있다.

○ 또한 18세기 전반에 발간된 ꡔ여지도서ꡕ에는 향교의 위치와 규모에 대해 철원 文廟(鄕校)는 남쪽 3리에 있으며 전체규모가 54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로 보면 철원향교에 대한 전체 규모를 언급한 기록으로는 가장 이른 기록이 될 것이다. 이후에 발간된 지리지의 기록에서도 철원향교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대부분 ꡔ여지도서ꡕ의 내용을 답습하고 있다.

○ 한편 일제강점기에도 향교시설은 대부분 그대로 유지되었고, 1915년에는 군수 유흥종이 40여칸의 대성전과 東·西齋,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이후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이곳이 공산치하에 놓이면서 향교건물과 토지는 몰수당하였고, 향교는 고아원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전쟁기간중 완전 소실되었다.

○ 전쟁이 종결되면서 철원향교 일대는 수복되었으나 향교터가 민통선 안에 놓이게 됨에 따라 군의 통제 및 통행의 불편 등으로 원위치에 복원하기 어렵게 되자 1967년 철원읍 화지리에 향교를 새로 신축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87년 (구)철원향교터에서 초석 8개, 장대석 25개를 이전하여 대성전을 개축하였고 이후에도 몇 차례 개수를 거쳤다.

○ 철원군에서는 최근 철원향교를 원자리에 복원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하면서 복원자료 확보 및 매장문화재 조사를 위해 2004년 향교터를 시굴조사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향교와 관련이 없는 통일신라시기 석등하대석을 비롯한 여러 유물과 유구가 확인되어 2005년 재차 발굴조사를 시행하여 복원을 위한 기초자료는 확보하였으나 이전시대의 유구와 유물, 주변 토성의 확인 등으로 원위치에 복원이 불가하게 되었다.(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3,00870000,32&fla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