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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요동백김응하장군묘비(강원도 유형문화재105호)

천지연미소바위 2013. 6. 15. 14:01

철원 요동백김응하장군묘비는 김은하장군 사당인 표충사(http://blog.daum.net/dbsqkqh/4129) 안에 있다.

 

 

 

 

 

 

 

 

 

  조선시대의 무신인 김응하(1580∼1619) 장군의 묘비로, 향교골에 자리하고 있다. 김응하는 선조 38년(1605)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광해군 10년(1618) 여진족의 건주위(建州衛)가 반란을 일으킬 때 명나라에서 조선에 군사를 요청하여 그가 명나라에 원군으로 가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에 대한 공으로 명나라에서는 요동백(遼東伯)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그 처자에게 백금을 보내 주었으며, 조선의 조정은 영의정으로 벼슬을 높여 주었다. 비는 거북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렸다. 숙종 9년(1683)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박태유가 글씨를 썼으며, 비의 이름은 김수항이 썼다. 김응하 장군은 조선(朝鮮) 선조(宣祖) 13년(1580) 철원군(鐵原郡) 어운면(於雲面) 하갈리(下葛里)에서 고려(高麗) 명장(名將)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으로 태어났다.장군은 25세 때 무과급제(武科及第)하여 도원판관(度原判官)과 삼수군수(三水郡守)로 있으면서 국경지대(國境地帶)의 방비를 튼튼히 하였으며 광해군(光海君) 10년(1618)에 만주(滿洲) 여진족(女眞族)의 건주위(建州衛)가 반란을 일으키자 명(明)나라에서 조선(朝鮮)에 군사를 요청하자 김응하 장군은 광해군 11년(1619)에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의 좌영장으로 명나라에 원군으로 가 부하 3천 명을 거느리고 적군 6만 명과 장렬히 싸우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적병에게 포위되어 40세를 일기로 전사하였다. 이에 대한 공으로 광해군 12년(1620) 조정에서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贈)하였으며 명나라에서도 요동백을 봉(封)하고 처자에게 백금(白金)을 보내었다.묘정비(廟庭碑)(조증(詔贈) 요동백(遼東伯) 김응하(金應河) 장군(將軍) 묘비(墓碑))는 현종(顯宗) 10년(1669) 6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글과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박태웅(朴泰雄)의 글씨에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의 전서제자(箭書題字)를 곁들여 제작하여 숙종(肅宗) 9년(1683) 철원군(鐵原郡) 철원읍(鐵原邑) 화지리(花地里) 향교골(鄕校谷)(철원부 서화전리 일봉산·역촌동)에 사당(祠堂) 표충사(褒忠詞)과 함께 건립(建立)하였다. 그후 사당은 6·25전란으로 소실(燒失)되고 묘비만 초야에 있게 되자 당시 3군사령관인 이세호(李世鎬) 대장이 1974년 11월 3군사 영내로 옮겨 봉안(奉安)하다가 철원군과 종중(宗中)의 이전 요구에 따라 1984년 4월 3일 환원되었으나 원위치 복귀가 불가하여 현위치에 봉안케 되었다.(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1,01050000,32&fla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