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분 앞에는 묘비는 없어지고 묘비를 받치는 비좌만 남아 있다.
연천 경순왕릉방향으로 가다보면 박진장군묘는 오른쪽으로 가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한참을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가라는 안내판이 있다.
그런데 막아 놓았다. 옆으로 들어갈 수 있다.
잡초가 우거져 혹시 뱀이라도 나올까 걱정이다.
박진장군 묘에서 내려다본 다른 사람들의 묘. 처음에는 박진장군 후손묘일줄 알았다.
위에 있는 묘가 박진장군묘. 문화재에 우둔한 본인이 보기에 이 묘가 가치 있어 보인다.
조선 선조 때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왜군과의 전투에서 큰 업적을 세운 의열공 박진(?∼1597) 장군의 묘이다. 선조 22년(1589) 심수경의 천거로 등용되어 선전관을 거쳐, 선조 25년(1592) 밀양부사가 되었다. 이해 4월 왜적이 침입하여 부산·동래 등이 함락되는 상황에서 싸우다 포위되자 밀양부를 소각하고 후퇴하였다. 이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나머지 병사를 모으고, 별장 권응수를 파견하여 영천의 의병을 지휘하게 하여 영천성을 탈환하였다. 이어서 안강에서 16개읍의 병력을 모아 경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한 달 뒤에 군사를 재정비하여 경주성을 다시 공략하여 성을 탈환하였다. 선조 26년(1593) 독포사가 되어 밀양·울산 등의 싸움에서 이겼고, 경상우도·전라도·황해도 등의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뒤에 참판에 이르렀다. 묘역은 민간인 통제선 안에 위치하고 있다. 묘 앞에는 묘비를 받치는 사각형의 기대만이 남아 있으며, 그 앞으로 상석과 근래에 설치한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이 있다. 묘의 오른쪽에는 1987년에 후손이 건립한 묘비가 세워져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과의 전투에서 큰 업적을 세운 박진(?∼1597)장군을 모신 유택이다. 봉분 앞의 묘비가 있던 자리에 비신(碑身)은 없고 비를 받치는 장방형의 기대(基臺)만 남아 있는데 후대에 손실된 것으로 보인다. 기대 앞에는 상석(床石)과 근래에 설치한 향로석이 있는데 상석에는 명문(銘文)이 있던 흔적이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하다. 상석의 전방 좌우에는 문인석이 있다. 봉분의 우측에는 1987년에 후손이 건립한 오석제(烏石制) 묘비가 설치되어있다. 박진은 무신 집안 출신으로 비변사(備邊司)에 무신으로 있다가 선조(宣祖) 22년(1589) 심수경(沈守慶)의 천거로 등용되어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선조 25년 밀양부사(密陽府使)가 되었다. 같은 해 왜적이 침입하여 부산·동래 등이 차례로 함락되는 전황속에서 싸우다 패하여 포위되자 밀양부를 소각하고 후퇴하였다. 이후 경상좌도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임명되어 나머지 병사를 수습하고, 별장(別將) 권응수(權應銖)를 파견하여 영천의 의병을 지휘하게 하여 영천성을 탈환하였다. 이어서 안강에서 16개 읍의 병력을 모아 경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한 달 뒤에 군사를 재정비하여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로 경주성을 다시 공략, 많은 수의 왜적을 베고 성을 탈환하였다. 이 밖에 선조 26년에 독포사(督捕使)로 밀양·울산 등지에서 전과를 올렸고, 벼슬은 경상우도·전라도·황해도병마절도사를 거쳐 참판(參判)에 이르렀다.(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 내용에 박진장군묘역이 '민간인 통제선 안에 위치하고 있다.'라고 되어 있는데 지금은 통제를 안받아요. 현재는 연천문화재 중에서 미수허목묘역만 민통선 안에 있어 군인의 통제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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