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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죽정최유경묘역(경기도 문화재자료120호)

천지연미소바위 2013. 7. 6. 21:04

  고려말에서 조선초의 문신으로 청렴결백과 효로 이름이 난 용인의 역사인물 최유경. 최유경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우왕에게 고변한 고려 충신이자, 조선 개국 원종공신으로 대사헌과 판한성부사를 역임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숭례문과 풍남문 축성에 관여했다.

  죽정 최유경묘역은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 산1-1'에 위치하나 너무 넓은 번지라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 76 번지' 나 '기흥구 공세동 80번지'로 찾아가는 것이 쉽다. 여기서 조금만 올라가면 있다.

 

 

 

문화재청에 있는 주소인 '용인시  기흥구 공세동 산1-1'로 찾아가니 우회전하란다.

 

 

  이 근처에 내비가 안내를 종료한다. 주변 사람에게 물어도 모른단다. 공세동 산1-1번지가 너무 넓어 내비가 다른 곳으로 안내 되었다. 

 

 

포기하고 경기도 문화재자료42호인 공세리 오층석탑을 찾아가다 우연히 죽정최유경묘역 안내판을 보았다. 

 

 

입구에 있는 죽정최유경 신도비와 효렴사. 사당 이름은 최유경의 청렴한 기상과 효행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 효렴사를 좌측에 두고 700여m를 직진하면 우회전하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이곳에 적당히 주차하고 쇠사슬로 막아 놓은 곳으로 걸어간다.

 

 

 

 

 

 

 

 

죽정최유경의 아들 최사강묘

 

 

 

 

최사강묘 뒤로 죽정 최유경묘가 있다. 

 

 

 

 

 

 

 

죽정 최유경묘

 

 

 

 

 

 

 

 

 

 

 

 

 

  최유경(崔有慶)의 묘소는 기흥구 공세동 자봉산(紫鳳山) 기슭에 있다. 그의 묘는 조선 초기의 형식인 방형상분묘 (方形雙墳墓)로서 2단의 장대석 (長臺石)이 둘러져 있고, 묘 앞에는 묘표(墓表)·상석· 향로석·장명등, 그리고 좌우에는 동자석(童子石)·문인석(文人石) 등의 석물이 각각 배치 되어 있다. 묘 우측에 위치한 묘갈(墓碣)은 장방형 지대석 위에 옥개석(屋蓋石)을 갖추었으며, 비신의 석질은 대리석이다. 묘역 입구에는 영덕재(永德齋)가 건립되어 있고, 그 우측에는 1950년대 에 건립된 신도비가 있다. 하단에 있는 묘는 그의 아들로서 판이조사 (判吏曹事)를 지낸 사강(士康)부부의 묘다. 쌍분임에도 장면 등을 묘 앞에 각각 1개씩 세운 것이 특징이다. 최노첨의 묘는 방형 지대석이 생략된 원형 봉토분으로서 묘지 기단석이 생략되었고, 상석 하단에 앙련(仰蓮)의 연화문을 둘른 것이 특징이다. 최노첨은 최유경의 8대손으로 인조때 용인현령을 지낸 바 있다. 최유경(1343-1413)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자는 경지(慶之), 호는 죽정(竹亭),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고려 공민왕 21년(1372) 판도좌랑(判圖佐郞)이 되었다. 사헌 장령(司憲掌令)으로 있을 때 윤충좌(尹忠佐)의 교만 방자함을 탄핵했다. 이어 여러 벼슬을 지내며 공을 세웠다. 특히 이성계(李成桂)의 조선 개국을 도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다. 태조 6년(1397)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경기·충청 도체찰사(都體察使), 이듬해 개성유후(開城留侯)로서 경기우도(京畿右道)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가 되었다. 태종 1년(1401)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 왔다. 판한성부사(判漢城府使)로 있다가 사임했다. 태종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祿選)되었다. 시호는 평도(平度)이다.(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31,01200000,31&fla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