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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이수 선생묘(경기도 기념물54호)1

천지연미소바위 2014. 10. 8. 17:04

 구천군(귀천군, 龜川君) 이수는 중종대왕의 5왕자인 덕양군 이기의 손자이며,

풍산군 이종린(http://blog.daum.net/dbsqkqh/4953)의 차남이다. 광해군 9에 이이첨 등의 죄를 밝히고 윤선도 등을 변호하다가 전라남도 순천에 유배되었다. 그 때에 세운 망북정에 관련된 유지비(전라남도 문화재자료8호)가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그 후 인조반정으로 관직에 복귀하게 하였다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어가를 공주(公州)로 모시고 갔으며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강화로 모시고 갔다. 부인 정씨와 쌍분이고 묘 아래에는 이재가 글을 짓고 이승휘가 글씨를 쓴 신도비가 있다.

 

 문화재청에 순천 망북정유지비(전라남도 문화재자료8, http://blog.daum.net/dbsqkqh/367) 설명 내용에는 구천군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덕양군파 종중 홈피(http://www.dugyang.com/)에는 귀천군으로 되어 있다. 

 

 

  안내판에는 이수선생묘 앞에 동자석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 없어요. 다만 이수선생의 할아버지인 덕양군 이기 선생묘 앞에 동자석이 있다. 또 문화재청에 덕양군 이기 묘 사진을 올렸네요. 문화재청에 민원했네요.

 

답변 :

[주관부서] : 교육문화환경국 문화관광과

[작성자] : 최XX [전화번호] : 729-30XX

[답변내용] : 1. 평소 문화재에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 귀하께서 의견주신사항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반영하였으며, 문화재 안내판의 내용은 정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기타 궁금하신 사항은 성남시청 문화관광과(729-30XX)로 문의주시면 자세히 답변드리겠습니다. 끝.

 

 

이수선생묘는 좌측으로 간다.

 

 

이수선생묘는 보이는 철문 안으로 간다. 좌측에 넓은 주차공간(분당구 궁내동 360-9, 지도에서 11번 위치)이 있다. 문화재청에 주소가 '분당구 궁내동 산17'로되어 있는데 이 번지는 없고 묘가 속해있는 궁내동 산17-1번지는 너무 넓어 찾아가기 힘들다. 주차장 번지로 찾아가기 권해본다. 문이 잠겨있어 망설이는데 주민이 좌측벽에 있는 쪽문으로 들어가면 된다며 앞장을 선다.

 

 

보이는 사당은 정희사로 중종의 5왕자인 덕양군 이기의 사우(지도에서 10번 위치)이다.

 

 

 

 묘역안내도에서 1번이 덕양군 이기 묘(쌍분)이고, 위에 있는 6번(쌍분)이 손자인 이수선생묘이다. 손자가 할아버지보다 위에 있다. 이 묘역 중에서 손자인 이수 선생묘만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아래부터 위로 갈수록

1번 위치 : 덕양군 이기 묘 : 중종의 5남, 쌍분

2번 위치 : 구(귀)성군 이첨 묘 : 풍산군 이종린의 장남, 덕양군의 큰 손자

3번 위치 : 구(귀)천군 이수 묘 : 풍산군 이종린의 차남, 덕양군의 작은 손자, 쌍분

4번 위치 :  봉래군 이형윤 묘 : 이수의 장남. 덕양군의 증손자. 증손자가 맨 위에 있다.

 

 

 

묘소에 올라가는 길이다.

 

 

 

 

 

이수의 신도비

 

 

 

중종대왕의 5남 덕양군 이기 묘. 동자석이 있다.

 

 

 

 

 

 

 

 

 

 

 

 

구성군(귀성군, 龜城君) 이첨 묘. 풍산군 이종린 장남 

 

 

 

 

 

 

 이수선생묘. 쌍분이다.

 

 

 

 

 

 

봉래군 이형윤 묘. 이수선생의 장남이다.

 

 

 

 

 

 

봉래군 이형윤 묘에서 내려다본 아버지 이수 묘, 큰아버지 이첨, 증조할아버지 덕양군 묘. 할아버지 이종린묘(http://blog.daum.net/dbsqkqh/4953)는 성남 분당 하산운동에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충숙공 이수(?1645)의 묘이다. 왕족의 후손으로 학문이 뛰어났으며 선조 25(1592) 임진왜란 때에는 국왕을 모시게 되어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광해군 9(1617)에 이이첨 등의 죄를 밝히고 윤선도 등을 변호하다가 전라남도 순천에 유배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관직에 복귀하게 되었다. 인조 2(1624)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국왕을 공주(公州)로 모시고 갔으며, 인조 5(1627)에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국왕을 강화로 모셨다. 죽은 뒤 정1품 벼슬 등급에만 기록할 수 있는 현록대부(顯錄大夫)에 오르기까지 했다. 부인 정씨와의 합장묘로 쌍분이고 봉분 아랫부분에는 길고 네모난 둘레석을 돌려 묘를 보호하고 있다. 그 좌우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이 1쌍씩 배치되어 있다. 묘 아래에는 이재가 글을 짓고 이승휘가 글씨를 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3,00540000,31&fla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