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인천/유형문화재,기념물

안양 중초사지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164호)

천지연미소바위 2011. 4. 12. 15:44

중초사터에 남아 있는 탑으로, 원래의 자리는 아니고 1960년 옛 터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을 1층으로 쌓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탑신부는 2·3층 몸돌이 없어진 채 지붕돌만 3개 포개져 있다. 기단과 1층 몸돌의 4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매우 두꺼워 급한 경사를 이루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끝에서 희미하게 들려있으며, 밑면의 받침은 1·2층은 4단, 3층은 3단을 두어 간략화 되었다. 전체적으로 기단부가 너무 크고, 탑신의 1층 몸돌이 그에 비해 지나치게 작아 불안정한 모습이다. 1층 기단이라는 특이한 점과 지붕돌의 모습 등으로 보아 고려 중기 이후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양시 석수동 중초사지(中初寺址) 위에 있는 유유산업의 정문에 들어서면 좌측에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제 4호)와 고려시대 석탑이 문화재 보호구역(826㎡)내에 나란히 서 있고 향우측에는 또다른 석탑의 부재로 추정되는 면석(面石)이 있다. 그중 석탑은 1963년에 보물 제 5호로 지정되었다가 최근에 해제된 상태인데, 원래는 창고 건물 부근에 있었던 것을 1960년에 유유산업을 건립할 당시 당간지주 옆인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것이라고 한다. 이 석탑은 전체 높이 2.22m로 이삼층의 탑신석(塔身石)과 상륜부(相輪部)를 결(缺)해 완전한 상태가 아니다. 이 곳이 중초사지(中初寺址)라는 것과 이 석탑이 중초사탑(中初寺塔)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당간지주(幢竿支柱)에 새겨진 명문에 의해 밝혀졌는데, 그 명문(銘文)은 다음과 같다. 중초사(中初寺)는 통일신라 흥덕왕대의 사찰로 당시의 거찰(巨刹)이었던 황룡사(皇龍寺)의 항창(恒昌)이 절주통(節州統)으로서 이 당간지주(幢竿支柱)의 불사(佛事)에 참여할만큼 대찰(大刹)이었겠으나,『동문선(東文選)』,『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흥지도서(興地圖書)』,『가람고(伽藍考)』같은 문헌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아 고려후기에 이미 폐사된 사찰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초사지(中初寺址) 삼층석탑은 지면(地面) 위에 두꺼운 지대석(地臺石)을 마련하고 그 위에 이단괴임으로 조각된 별석(別石)이 놓여 상층 기단부(基壇部)를 받치고 있는 단층 기단 형식을 취하고 있다. 4매로 짜여진 기단중석(남면은 교체?)은 탱주(탱柱) 없이 우주(隅柱)만 조각되었고, 그 위에 덮여진 갑석(甲石)은 2매의 판석(板石)으로 구성되었으며 괴임은 일단이나 남면은 약간 부서진 상태이다. 탑신석(塔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1매의 돌로 조각되었는데, 1층 탑신석(塔身石)만 있을뿐 이삼층은 탑신석(塔身石) 없이 옥개석(屋蓋石)만 얹어 있으며 노반(露盤) 이상의 상륜부(相輪部) 역시 결(缺)한 상태이다. 옥개석(屋蓋石)의 낙수면(落水面)이 완만한 편으로, 받침은 1 ·2층이 4단이고 3층은 3단이다. 대체로 이 탑은 원형을 잃었으나 고려시대 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출처 : 문화재청)

 

 

중초사지 삼층석탑은 안양예술공원 가는 길목에 다리 건너 회사 안에 있다.  

 

 

 

삼층석탑 바로 옆에 보물4호인 중초사지 당간지주가 있고, 근처에 경기도 유형문화재92호인 석수동마애종이 있다.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1,01640000,31&queryText=((V_KDCD=21)) <and>(((V_NO >=164)<and>(V_NO <= 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