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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정대년신도비(경기도 유형문화재148호)

천지연미소바위 2015. 5. 12. 11:20

 전에 정대년 신도비를 찾아갔다가(http://blog.daum.net/dbsqkqh/5150) 먼 발치에서 보고 다시 찾아 갔다.

 

 

장호원 방향에서 찾아 가는 중이다. 왼쪽에 입구가 있다. 이곳에 좁은 주차 공간이 있는데 이곳에 주차하시기를...  주소는 대략 '점동면 원부리 산 3-3'이다.

 

 

전에처럼 철문이 잠겨있어 기둥 왼쪽으로 들어 갔다.

 

 

 

 

마침 나무 관리 하는 분이 있어 쉽게 신도비를 찾가 갔다.

 

 

신도비는 사진 오른쪽 청기와 건물안에 있다.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 안으로 간다.

 

 

청미서당이다.

 

 

서당 왼편으로 간다.

 

 

보이는 나무문을 열고 들어 가면 바로 있다.

 

 

 현장 안내판에는 정대년 신도비가 '점동면 원부리 산2-2'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이 주소는 정대년 묘소가 있는 곳이고 신도비는 '점동면 원부리 205-3''에 있다. 

 

 

 

 

 

 

 

 

 

 

 

 

 

이 여견문 안에 사당인 혁림사가 있다.

 

 

사당인 혁림사

 

 

신도비가 있는 건물.

 

 

 

 

정대년 묘소를 찾아 가는 중이다.

 

 

사암공파 묘역은 좌, 중, 우측에 있는데 정대년 묘소는 오른쪽에 있다. 좌측묘역이다.

 

 

중앙쪽 묘역이다.

 

 

오른쪽 묘역이다. 정대년 묘는 3기중 맨 앞에 있다.

 

 

맨 얖에 있는 정대년 묘이다.

 

 

 

 

 

 

 

 

 

일하시는 분들이 맨 오른쪽에 혼자 있는 것이 정대년 묘소라고 했는데 아니다.

 

 

  신비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사암 정대년(15071578)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정대년은 중종 27(153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선조 11(1578)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에는 영지무늬와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머릿돌에는 용과 구름무늬를 빈틈없이 조각하였다. 비문에는 정대년의 성장과정과 관직생활, 그리고 간소한 생활 등이 적혀 있으며 부인의 집안과 성품, 자손들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손자 정호가 영의정 노수신이 지은 비문을 새기려 하였다가 임진왜란으로 실행치 못한 것을, 뒤에 병조참판 오준의 글씨와 홍문관부제학(왕의 자문기관인 홍문관의 정 3품 벼슬) 김광현이 쓴 비명칭을 받아서 증손인 양우·양필 형제가 세웠다. 비 뒷면에는 이러한 사실과 자손 170명의 명단을 충청도관찰사 정양필이 적어, 예조정랑(예조의 정 5품 벼슬) 유시영이 글씨를 썼다.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1,01480000,31&fla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