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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공안공 정옥형·충정공 정응두신도비(경기도 문화재자료91호)

천지연미소바위 2015. 7. 17. 15:17

 용인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입구에 있는 나주정씨 세장지에는 중시조인 병조참판·동지중추부사 월헌 정수강 묘역이 있는데 그의 아들인 정옥형과 손자인 정응두의 신도비가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정수강 가계도

정안경정연정자급정수강

  1정옥경정응허정윤지정호서(생부 정윤복)

                 →정응진

  2정옥형정응두정윤조정호인, 정호의, 정호례, 정호지

                             →정윤희정호덕, 정호경, 정호성

                             →정윤우정호겸, 정호양, 정호근

                             →정윤복정호약, 정호공, 정호관, 정호선, 정호서(정윤지에게 양자감), 정호제

  3정옥정

용인 나주정씨 세장지에는 위에 파란색 글씨의 10분이 모셔져 있다.

 

붉은색의  정윤복, 정호선은 다른곳에 모셔져 있다.

용인 정윤복-정호선 묘(용인 향토유적47, http://blog.daum.net/dbsqkqh/1828)

용인 정윤복-정호선 신도비(용인 향토유적47, http://blog.daum.net/dbsqkqh/1829)

 

 

문화재청에 신도비 주소가 '양지면 제일리 산37-1'로 되어 있는데 실제 주소는 총신대학교 입구인 '양지면 제일리 524-7'이다. 문화재청에 민원했네요.

 

답변 : 1. 용인시 문화재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귀하께 감사합니다.
2. 귀하께서 상담접수하신 내용대로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등재된 "공안공정옥형.정응두신도비"의 주소 정보를 현재 지번에 맞게 수정하였음을 답변드립니다.
3. 추가 문의사항이 있으면 용인시청 문화관광과(031-324-21XX)로 연락주시면 답변해드리겠습니다.

 

 

 세장지 입구에 문화재인 신도비가 있다.

 

 

 

보이는 육교가 양지IC 부근이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방향으로 간다.

 

 

 

위에 있는 도로는 영동고속도로이다.

 

 

 

직진하면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이고 나주정씨 세장지는 직전에 우회전한다.

 

 

우측으로 다리를 건너자마자 신도비가 있다.

 

 

 

왼쪽에 있는 공안공 정옥형 신도비

정옥형의 본관은 나주. 자는 가중(嘉仲), 호는 월봉(月峰). 명종 때 형조판서로 소윤이 대윤을 제거할 때 소윤에 가담하여 보익공신3등에 책록되고 금천군에 봉해졌다. 아버지는 병조참판 정수강(壽岡)이다.

 

 

 

 

 

 

 

 

오른쪽에 있는 충정공 정응두 신도비

자는 추경(樞卿). 아버지는 병조판서 공안공 정옥형이다.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비에 새겨 그의 묘 가까이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들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정옥형과 그의 아들 정응두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정옥형(14861549)은 중종 8(1513)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검열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맡아보았다. 대사간·대사헌에 이르러서는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데 힘썼으며, 당시 김안로의 권세가 심해지자 조정을 떠나 외지를 돌며 민심을 두루 살피기도 하였다. 중종 39(1544)에는 병조판서가 되어 국방문제를 맡아보았으며, 명종이 즉위한 후에는 소윤파에 가담하여 대윤파를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3등공신이 되었다. 좌찬성에까지 오른 후 생을 마치었으며, 그후 공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정응두(15081572)는 중종 16(1521)에 진사가 되고, 중종 29(1534)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선공감직장이 되었다. 그후 이조좌랑·좌부승지·병조판서 등의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21(1566)에는 판중추부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죽은 후에는 충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한 채에 나란히 서 있는 2기의 비는 모두 같은 양식으로, 높직한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다만 정옥형의 비는 지붕돌에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어 조각에서는 조금씩의 차이를 보인다. 각각 조선 선조 17(1584), 영조 4(1728)에 세운 것으로, 원래는 고양 지역에 있었으나 도시계획으로 인해 이곳 용인 지역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31,00910000,31&fla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