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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여주이씨 옥산문중 유묵–해동명적(보물 제526호)

천지연미소바위 2021. 1. 19. 11:10

 

보물 제56호를 보관중인 어서각

 

경주 독락당(보물 제413, http://blog.daum.net/dbsqkqh/5758) 참조

 

 

         아래 사진 출처 : 문화재청

보물 제526호
보물제 526-2호
보물 제 526-2호
보물 제526-2호

 

여주이씨 옥산문중 유묵해동명적(보물 제526)

여주이씨 옥산문중 유묵 - 해동명적(驪州李氏 玉山門中 遺墨 - 海東名蹟)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신공제(14691536) 선생이 우리나라 역대 명필의 글씨가 돌에 새겨 있는 것을 탁본하여 상하 2책으로 묶은 것이다. 상권에는 조선시대 문종과 성종의 어필을 앞에 따로 놓고 다음에 신라시대 최치원, 김생, 영업의 3인과 고려시대 탄연, 이암, 신덕린 등의 3인을 합한 6인의 글씨를 모아 놓았다. 하권에는 이강, 승려 혜근, 성석린, 박초, 권근, 이첨, 정도전, 정총, 민자복, 신색 등 12인의 글씨가 실려 있다. 이 책은 탁본이라 하더라도 고대의 서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비문에 나타나지 않은 필적을 많이 수집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여주이씨 옥산문중 유묵-원조오잠, 사산오대(보물 제526-2)

원조오잠(元朝五箴)은 회재(晦齋)이언적(李彦迪)27세 때 지은 외천잠(畏天箴), 양심잠(養心箴), 경신잠(敬身箴), 개과잠(改過箴), 독지잠(篤志箴)을 퇴계(退溪)이황(李滉)이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아 평소 잊지 못하여 오던 중 이언적의 아들 이전인(李全仁, ()는 잠계(潛溪), 1516~1568)의 요청에 의하여 쓴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10폭에 적혀 있는 이황의 발문에 보이는데 여기에는 잠계 이전인의 요청에 의해서 썼다는 기록은 없고 끝에 후학 이황 근서(後學 李滉 謹書)’라고 쓴 묵적이 선명히 남아 있다. ‘원조오잠은 퇴계가 회재의 학문과 사상을 어떻게 보고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점을 친필로 남겼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원조오잠은 광폭의 닥종이에 매폭 6(), 116(), 자경(字徑) 8해서(楷書)로 쓴 것이다. 발문은 4(), 자경 약 4미만의 해행서체로서 글씨는 분방하거나 과장된 또는 거칠거나 연미한 필서가 전혀 없고, 단중전아(端重典雅)하여 순정한 원칙을 지키는 도학자의 풍모가 그대로 투영된 대표적 유묵(遺墨)이라고 할 수 있겠다. 퇴필(退筆)의 특징은 송설체(松雪體)의 유려한 필법 위에 왕희지 부자의 굳세고 단정한 필법을 보탠 것이라고 김인후는 전별시에서 언급하였는데, ‘원조오잠은 이러한 퇴묵(退墨)의 전형적인 예에 속한 것이다. 사산오대(四山五臺) 이언적은 1530년 이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좌천되자 관직을 그만 두고 귀향한 뒤, 이듬해 자옥산 기슭에 독락당(獨樂堂) 등의 옥산정사를 짓고 주위의 승경(勝景)을 명명하였다(소위 사산오대’). 이들 글씨는 그중 자옥산(紫玉山)용추(龍湫)귀영대(歸詠臺)징심대(澄心臺)세심대(洗心臺)탁영대(濯纓臺)관어대(觀魚臺) 7곳의 명칭을 대자(大字)로 써서 축장(軸粧)한 것들로, 회재의 아들 이전인(李全仁)원조오잠의 글씨를 받을 때 이 대자 편액서도 함께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퇴계의 대자서(大字書) 편액(扁額)은 도산서원의 역락서재(亦樂書齋), 안동(安東) 광산김씨(光山金氏) 예안공(禮安公) 종택(宗宅)후조당(後彫堂), 읍청정(挹淸亭), 도산의 월천서당(月川書堂), 예천의 선몽대(仙夢臺)등 대표적인 것이 많다. 그러나 서각(書刻)을 한 편액은 존재해도 그 원본의 필적이 다 전하는 것은 아닌데, 독락당의 사산오대는 대자 편액서가 고스란히 전한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