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인천/유형문화재,기념물

용인 문정공 조광조 묘 및 신도비(경기도 기념물169호)

천지연미소바위 2011. 6. 14. 17:26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다. 43번 도로 상현교차로 서편에 있다. 수원에서 수지방향으로 가다보면 왼편에 있다. 근거리에 조광조를 모신 심곡서원(http://blog.daum.net/dbsqkqh/4866)이 있다. 심곡서원은 주차공간이 넓다.

 

 

 

 

 

 조광조 신도비

 

 

 

 

조광조 묘 아래에 있는 소나무

 

 

 조선 중기의 문신 정암(靜庵) 조광조(1482∼1519) 선생의 묘소이다. 그는 어려서 김굉필에게 학문을 배운 이래로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한사람이 되었다. 중종 5년(1515) 사마시에 합격한 후, 새롭게 변화를 모색하고 있던 시대적인 분위기를 타고 관직에 나섰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유교로 정치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고,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하여 ‘여씨향약’을 8도에 실시하였다. 신진사류들과 함께 잘못된 제도의 개혁 및 그에 따를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노력하였지만 기성세력이었던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사게 되었고, 결국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묘소는 수지면 상현리(서원말)에 있다. 묘는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된 이씨(李氏)와 합장한 것이다. 묘 앞에는 대리석으로 묘표와 평상석·향로석·좌우에는 망주석·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선조18년(1585) 건립된 것으로 재료는 대리석이며 높이 244㎝, 폭 93㎝, 두께 34㎝의 규모이다. 장방형 비좌 에는 국화문이 조각되어 아무런 치장이 없는 품격 높은 비신과 조화를 이루었다. 비 앞면 상단에는 전자(篆字)로「문정공정암조선생신도비명(文貞公靜庵趙先生神道碑銘)」이라 횡서(橫書)했다. 신도비문은 노수신(盧守愼)이 짓고, 이산해(李山海)가 글씨를 썼으며, 김응남(金應南)이 전(篆)을 썼다. 조광조(1482-1519)는 조선 중종때의 학자·문신으로,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김굉필 에게 수학(修學)하였다. 중종 5년(1510) 진사, 중종 10년(1515)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뒤 전적(典籍)·감찰을 역림하였다. 중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왕도정치 를 실현케 했고,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단행케 했다. 대사헌에 올라 신진사류를 과감히 등용케 하고, 정국공신의 훈공을 대폭 삭제하는 등 급진적 개혁을 단행하여 훈구파(勳舊派)의 반발을 샀다. 훈구파의 남곤 (南袞)·심정(沈貞)등이 무고(誣告)하여 능주(凌州)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사사(賜死)되었다. 선조(宣祖) 초에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시호는 문정이다. 문집으로 「정암집(靜庵集)」이 있다.(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3,01690000,31&queryText=(`조광조`)<in>z_tit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