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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오희문 쇄미록(보물1096호)

천지연미소바위 2011. 7. 19. 11:21

임진왜란 때 오희문(1539∼1613)이 난을 겪으면서 쓴 일기로, 선조 24년(1591)∼선조 34년(1601) 2월까지 약 9년 3개월간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오희문은 학문에 뛰어났으나, 과거급제를 못해 정식으로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의 아들 오윤겸은 인조 때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손자인 오달제는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 청나라까지 끌려가 죽음을 당한 삼학사(三學士)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일기는 총 7책으로 되어있고, 각 책의 끝에는 국왕과 세자의 교서, 의병들이 쓴 여러 글, 유명한 장수들이 쓴 성명문, 각종 공문서, 과거시험을 알리는 글, 기타 잡문이 수록되어 있어서 당시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밖에 임진왜란 시기에 있어서 관군의 무력함에 대한 지적과 비판,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낸 것과 화의 진행과 결렬, 정유재란에 관한 것 등 장기간에 걸쳤던 전쟁에 관하여 전반적이고 광범위하게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오희문 자신이 관직에 있지는 않았지만, 친분이 두터운 많은 고을수령들의 도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에 누구보다 정확하게 종합적으로 정보를 입수,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장수현에서 보고 들은 각 지역의 전투현황과 각 의병장들의 활약상, 왜군의 잔인한 살인과 약탈행위, 명나라 군대의 무자비한 약탈과 황폐화, 전란에 따른 피난민사태, 군대징발, 군량조달 등 다른 자료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사들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당시 민중의 생활상과 지방행정의 실태 등 임진왜란에 관계되는 사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회전반의 경제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들이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으며, 민간인으로서 생활체험적 기록이기 때문에 더욱 그 가치를 더해준다. 쇄미록(쇄尾錄)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當時) 오희문(吳希文)이 난(亂)을 직접 체험(體驗)하면서 기록한 일기(日記)로서 선조(宣祖)24년(年)(1591) 11월(月)부터 동왕(同王) 34년(年)(1601) 2월(月)까지 9년(年) 3개월간(個月間)의 사실(事實)을 기록(記錄)한 것이다. 저자(著者) 오희문(吳希文)은 자(字)는 비연(斐然), 본관(本貫)은 해주(海州), 경민(景閔)의 아들, 유학(儒學)을 공부하여 문필(文筆)이 훌륭하고 행실(行實)이 돈독(敦篤)하며 식견(識見)이 해박(該博)하였으나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식(正式) 관로(官路)에는 오르지 못하고 다만 만년(晩年)에 아들 윤겸(允謙)의 주선(周旋)으로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을 지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아들 윤겸(允謙)은 (호(號)가 추탄(楸灘)) 인조조(仁祖朝)에 영의정(領議政)을 지냈으며 손자(孫子) 달제(達濟)는 병자호란(丙子胡亂)때 끝까지 척화(斥和)를 주장하다 청(淸)까지 끌려가 절사(節死)한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이다. 이 초고(草稿) 일기(日記)는 총 7책(冊)인데, 제(第)1책(冊)은 임진남행일록(壬辰南行日錄), 임진일록(壬辰日錄), 제(第)2책(冊) 계사일록(癸巳日錄), 제(第)3책(冊) 갑오일록(甲午日錄), 제(第)4책(冊) 을미일록(乙未日錄), 병신일록(丙申日錄), 정유일록(丁酉日錄), 제(第)5책(冊) 정유일록(丁酉日錄), 제(第)6책(冊) 정유일록(丁酉日錄), 무술일록(戊戌日錄), 제(第)7책(冊) 기해일록(己亥日錄), 경자일록(庚子日錄), 신축일록(辛丑日錄) 등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각책(各冊) 권말(卷末)에는 국왕(國王)과 세자(世子)의 교서(敎書), 의병(義兵)의 격문(檄文), 명장(明將)의 성명문(聲明文), 통문(通文), 각종(各種) 공문서(公文書), 과거방목(科擧榜目) 기타(其他) 잡문(雜文)이 수록(收錄)되어 있어서 당시(當時)의 사정(事情)을 이해(理解)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서명(書名)을 쇄미록(쇄尾錄)이라고 한 것은「시전(詩傳)」의 패풍(패風) 모구장(모丘章)에 있는「쇄혜미혜(쇄兮尾兮) 유리지자(流離之子)」라는 구절(句節)에서 따온 것으로 유리기(流離記) 곧 피난록(避亂錄)이란 뜻이며, 이 일기(日記) 마지막에 “이후(以後)부터의 일기(日記)는 용지(用紙)도 다하고 또 서울에 다시 돌아와 유리(流離)할 때도 아니므로 붓을 그친다 ”고 한 데에서 이 일기(日記)의 목적(目的)이 피난중(避亂中)의 사실(事實)을 기록(記錄)하려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출처 : 문화재청)

 

 

 

 오희문 묘(용인시 향토유적34호,  http://blog.daum.net/dbsqkqh/1587),

아들 오윤겸 묘(경기도 기념물104호, http://blog.daum.net/dbsqkqh/1588),

손자 오달제 묘(용인시 향토유적3호,  http://blog.daum.net/dbsqkqh/1609) 모두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에 있음. 오윤겸 묘는 해주오씨 묘역 중앙에 있고 오희문 묘는 오른쪽 언덕위에 있는데 손자 묘는 43번 도로 반대편에 있음.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10960000,38&queryText=((V_KDCD=12)) <and>(((V_NO >=1096)<and>(V_NO <= 10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