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부산-대구/유형문화재,기념물

진주 의암(경상남도 기념물235호)

천지연미소바위 2011. 4. 14. 15:37

의암은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이다. 조선조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논개는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유인하여 이 바위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논개의 순국정신을 현창하기 위해 영남사람들이 의암이라고 명명하였다. 인조 7년(1629) 진주의 선비 정대륭(鄭大隆:1599∼1661)은 바위의 서쪽 벽면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전각하였고, 남쪽에는 한몽삼(韓夢參:1598∼1662)이 쓴 것으로 전하는 의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의암의 바닥 넓이는 3.65m×3.3m이다. 옆의 암벽에는 “한 줄기 긴 강이 띠를 두르고, 의열은 천년의 세월을 흐르리라(일대장강(一帶長江) 천추의열(千秋義烈))”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의암은 의기암(義妓巖)의 약칭이다. 촉석루 아래의 남강 변에 있다. 계사년(1593)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왜적들이 들 끊는 중에도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죽은 바위이다. 인조 7년(1629) 진주의 선비 정대륭(鄭大隆:1599∼1661)은 그 바위의 서쪽 면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전각하였고, 남쪽에도 한몽삼(韓夢參:1598∼1662)이 쓴 것으로 전하는 의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경종 때의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은 비변사에 신보(申報)한 대목에서 “의암은 영남사람들이 명명했다”고 하였다. 이것이 진주에 전해진 최초의 금석문이다. 뒷날 『진주목읍지』의 고적 의암 조에서는 “의암은 촉석루 아래에 있다. 임진왜란 때에 한 얼굴이 고운 기생이 있었다. 왜가 보고 기뻐하니 기생이 바위 위로 달려가서 서니 적이 뒤쫓아 왔다. 기생이 이르기를 너의 장수를 데리고 오면 내가 마땅히 따르겠다고 하니, 적이 과연 와서 욕을 보이고자 하였다. 이에 기생이 적장을 안고 물에 빠져 죽으니 뒷사람들이 이를 의롭게 여기어 의암이라는 두 글자를 그 바위에 새겼다. 기생의 이름은 논개이다”라고 하였다. 옆의 암벽에는 “한 줄기 긴 강이 띠를 두르고, 의열은 천년의 세월을 흐르리라(일대장강(一帶長江) 천추의열(千秋義烈))”는 글이 새겨져 있다. (출처 : 문화재청)

 

 

  진주 의암(義巖, 경상남도 기념물235호)은 진주 촉석루(경상남도 문화재자료8호, http://blog.daum.net/dbsqkqh/94) 아래 남강변에 있다. 논개가 1593년 7월 29일 왜장(게야무라 로쿠스케)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이다.(문화재청에는 6월로 되어 있는데....무엇이 옳은지?)

 

 

 

 

진주 촉석루 아래 의암이 보인다.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3,02350000,38&queryText=((V_KDCD=23)) <and>(((V_NO >=235)<and>(V_NO <= 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