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대전 736

김좌진장군묘(충청남도 기념물73호)

김좌진장군 묘소 뒤에 있는 묘소인데 상석을 보면 김형규진사, 부인 한산 이씨 묘로 되어 있다. 장군 묘소 옆에 있는 비문을 보면 장군은 김형균의 둘째 아들로 되어 있다. 장군묘소 뒤에 있는 분은 누구인지? 소나무가 받침대를 감싸고 들어 갔네여. 김좌진장군은 김형균의 둘째아들로 되어 있다. 비문이 오자가 아닐런지... ◦ 김좌진(1889~1930)은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출신이며, 호는 백야로 1920년 10월 일본군 대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목저으로 만주로 출병하자 소속 독립군인 북로군정서군을 백두산으로 이동시키던 중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만나 전투를 전개하여 일본군 3천여 명을 살상하는 커다란 승리를 올렸음. ◦ 이 청산리 대첩은 우리나라 무장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임. ◦ 1930년 1..

광성부원군 사우(충청남도 문화재자료143호)

문화재청에는 '송덕신송길 457-24'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청소면 재정리 산 71-11'에 있어요. 1. 광성부원군 사우 2. 광성부원군 김극성 묘소 3. 광성부원군 신도비 신도비 신도비 앞 600년된 느티나무이다. 돌을 품고 있는줄 알았다. 상처난 곳을 치료해 주었단다. 사우 왼편에 묘소가 보인다. 묘소에 올라 가는 계단이다. 광성부원군 김극성 묘소 정경부인신평이씨 묘소 사우와 오른쪽으로 신도비가 보인다. ◦ 보령출신의 조선전기 문신인 김극성(金克成, 1474~1540)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처음에는 청라면 장산리에 세웠던 것을 청천저수지의 조성으로 수몰지구가 되자 1960년 후손들이 그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 옮겼음. ◦ 보령지역에는 김극성의 후손인 광산 김씨들이 유력 ..

화암서원(충청남도 문화재자료138호)

◦ 화암서원은 1610년(광해군2)에 충청관찰사 정엽(鄭曄)과 이지함의 문인인 구계우(具繼禹)가 주도하여 건립하였으며, 1686년(숙종12)에 화암서원으로 사액(賜額)되었음. 흥성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 철폐되었다가 1922년 다시 복설되었고, 청천저수지 축조로 1959년에 현 위치로 옮겨 세워졌음. ◦ 처음에는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菡)과 명곡 이산보(鳴谷 李山甫)를 모셨고, 이어서 1723년에는 천휴당 이몽규(天休堂 李夢奎), 고종조에는 퇴우당 이정암(退優堂 李廷馣), 1971년에는 수암 구계우 등 5분의 위패를 모셨음. ◦ 1988년에는 이지함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지역 유림들이 매년 춘추로 제향하고 있음. ◦ 서원의 구조는 2단으로 된 터의 앞에는 동재, 서재, 강당, 관..

보령장현리귀학송(충청남도 기념물159호)

가운데 멀리 귀학송이 보인다. 지금은 한가지가 죽어 6가지가 아니고 5가지네여. 귀학송 주변에 있는 소나무. ◦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의 동생이며, 토정 이지함의 조카인 동계(東溪) 이산광(李山光, 1550~1624)이 광해군의 정치에 회의를 느껴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며, 시와 글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면서 지은 정자가 귀학정(歸鶴亭)이었음. ◦ 이후 이 곳에는 이산광의 후손들이 세거하여 왔고, 그의 6대손인 이실(李實, 1777~1841)이 소나무를 심었는데, 서로 다른 뿌리에 6가지로 뻗은 수형의 소나무로 성장하여 현재와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 되어 귀학송(歸鶴松) 또는 육소나무로 불리기도 함 정자에 학들이 날아와 ‘귀학정(歸鶴亭)’이라 하였고, 서로 다른 두 뿌리에 ..

신경섭가옥(충청남도 문화재자료291호)

◦ 조선후기의 팔작지붕으로 된 ㄱ자형의 사랑채와 ㅡ자형의 안채가 어우러져 ㄷ자형의 구조를 이룸. ◦ 안채에는 안방․대청․건넌방․고방․부엌을 들였고, 사랑채에는 사랑방과 사랑대청으로 되었는데, 사랑방 옆에 높은 누마루를 들여 전원을 조망하는 공간으로 활용하였음. ◦ 상량문에 숭정기원후계묘라 씌어져 있어 1843년에 지어진 고택임을 알수 있으며, 가옥의 동족 대문에는 신석붕의 효자정문 현판이 걸려있음.(출처: 문화재청)

공주소학리효자향덕비(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9호)

한채의 비각 안에 나란히 서 있는 2기의 비로, 향덕의 효행을 기리고 있다. 향덕은 신라 경덕왕대의 사람으로, 흉년과 전염병으로 인해 부모님이 가난과 병에 시달리자 자신의 살을 베어 봉양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왕이 그의 효행을 듣고 벼 300석과 집 한채, 토지를 내려 주었으며..

부여 매촌공 윤박(단) 묘소

본인의 직계 할아버지. 우암 송시열의 사위. http://blog.daum.net/dbsqkqh/4037 묘소는 ‘충남 부여군 초촌면 응평리 360-8번지’ 중앙쯤에 있고 사당은 ‘충남 부여군 초촌면 응평리 388번지’에 있다. 할아버지 휘가 경우에 따라 단과 박으로 되어 있는데 본인 생각으로는 박이 맞는것 같다. 박 博 단 摶 윤박 묘소 뒷편에 있는 선교랑 이녹의 묘. 윤박의 외조부모 묘. 지금까지 외손봉사하고 있다. 아래에 있는 큰아들 윤은교 묘소. 본인은 둘째 아들 윤주교 후손인데 묘소는 공주 탄천 안영리에 있다 매촌 외할아버지 이녹묘 매촌 할아버지 시사날 코로나로 인해 몇 명만 참석하여 음식을 초촐하게 차려 외손봉사로 제사를 지내었다. 매촌 할아버지 구 비석 음력 3월 둘째 일요일이 시제이다. 임..

논산 석호공 윤문거 묘소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망(汝望), 호는 석호(石湖), 시호는 충경이다. 아버지는 대사간 팔송 윤황이며, 어머니는 창녕성씨로 우계 성혼의 딸이다. 며느리가 송시열의 딸이다. 1630년(인조 8) 생원시에 합격하고, 1633년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예조와 병조의 좌랑, 제천현감, 춘추관수찬관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사간원정언으로 척화를 주장하였고, 그 해 12월 청나라가 침입하자 아버지를 윤황을 따라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가하였다. 그 뒤 동부승지, 호조참의, 경주목사, 홍문관부제학, 대사헌, 이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응하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연산의 구산서원, 노성의 노강서원, 석성의 봉호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