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대전/문화재자료,등록문화재

괴산 공림사 승탑(충청북도 문화재자료35호)

천지연미소바위 2012. 12. 23. 21:04

공림사의 뒤뜰에 따로 마련된 곳에 있는 2기의 부도로 동쪽과 서쪽 방향에 세웠다. 원래의 자리는 알 수 없으나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갖춘 모습이다. 공림사는 신라 48대왕 경문왕때 자정선사(慈淨禪師)가 수도하던 암자에 경문왕이 선사의 인물됨을 알고 국사(國師)의 존호(尊號)와 주석(住錫)하는 절에 공림사의 이름을 지어 ‘공림사(空林寺)’라 쓴 현판을 내렸다고 전한다. 조선 정종 원년에 함허당(涵虛堂) 득통화상(得通和尙)이 폐사된 절을 중창하고 주석하였으며, 이후 인조때 중창하였다. 1965년 극락전과 요사를 중건하였고, 1981년부터 13년간 탄성스님이 중건하였다. 2기의 부도는 모두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으로 크기와 모양이 비슷하다. 서쪽 부도는 받침 부분이 파손되고 지붕돌 일부가 없어졌으나 비교적 원형대로 잘 남아 있는 편이다. 동쪽 부도는 네모난 지대석 위에 팔각으로 된 하대석과 중대석 괴임을 놓고, 다시 중대석을 얹고 그 위로 상대석을 놓았다. 그리고 둥근 몸돌을 놓고 그위에 낙수면이 급한 지붕돌을 놓았으며, 지붕돌 위에 보주를 올렸다. 공림사에 있는 2기의 부도는 상태가 대체로 양호할 뿐만 아니라 몸돌이 원형인 것을 제외하면 팔각원당형 부도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좋은 자료이다. 공림사는 신라 48대 경문왕(景文王, 861∼874)때 자정선사(慈淨禪師)가 수도하던 암자에 경문왕이 선사의 인물됨을 알고 국사(國師)의 존호(尊號)와 주석(住錫)하는 절에 공림사의 이름을 지어 ‘공림사(空林寺)’라 쓴 현판을 내렸다고 전하는 고찰이다. 그러나 신라 경문왕이 ‘공림사(空林寺)’라는 현판을 내렸다는 문헌자료가 없고, 자정선사가 고려기의 인물일뿐만 아니라 현존의 유구와 사력으로 볼 때 공림사의 창건이 신라시대로 볼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 정종(定宗) 원년에 함허당(涵虛堂) 득통화상(得通和尙)이 폐사된 절을 중창하고 주석하였으며, 이후 인조(仁祖)때 중창하였다. 1965년 극락전과 요사를 중건하고, 근년에는 1981년부터 13년간 탄성 스님이 중건하였다. 공림사의 후원에 별단의 부도지(浮屠地)를 조성하여 2기의 부도를 동·서 방향에 세웠다. 원위치인지는 알 수 없으나 비교적 완형에 가까운 석조 부도이다. 2기의 부도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으로 크기와 모양이 비슷하나 서쪽 부도는 기단부(基壇部)가 파손되고 옥개석의 일부가 결실되었다. 서쪽 부도의 높이는 243cm이다. 동쪽 부도는 전체높이 266cm로 방형지대석 위에 8각하대석과 중대석 괴임, 중대석(中臺石), 상대석을 놓았다. 탑신석(塔身石)은 둥글고, 옥개석은 낙수면이 급하며 보주를 올렸다. 동쪽 부도와 서쪽 부도 전체 모습과 각부의 조성기법이 꼭 같다. 서쪽의 부도는 도괴되어 기단부의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부재가 흩어지지 않고 복원하여 옥개석 위의 보주를 제외하면 각부의 부재는 결실된 부분이 없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공림사 부도는 탑신만 둥글고 지대석에서 옥개석까지 팔각원당형이란 한국부도의 원형을 비교적 잘 유존하고 있다. 특히 각 부재도 거의 완존하기 때문에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서쪽 부도는 동쪽 부도의 모방작으로 추정된다.(출처 : 문화재청)

 

  충청북도 문화재자료35호인 괴산 공림사 승탑(공림사 부도)은 공림사 오른쪽 뒤뜰에 2기가 있다. 그 옆에 최근에 만들어진 승탑이 하나더 있다. 2기가 크기나 모양이 비슷하다. 문화재로 지정된지도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문화재청에는 이미지 사진이 없네요.

 

 

 

 

 

 

 

 

 

 

문화재청 :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31,00350000,33&queryText=(`공림사`)<in>z_title&maxDocs=15000&docStart=1&docPage=10&canasse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