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전라남도 기념물 제221호
명 칭 : 장흥풍길리청자요지 (長興豊吉里靑瓷窯址)
분 류 : 유적건조물 / 산업생산/ 요업/ 도자기가마
수량/면적 : 일원(2필지, 3,000㎡)
지정(등록)일 : 2004.02.13
소 재 지 : 전남 장흥군 용산면 풍길리 산130외 일원
시 대 : 고려시대
소유자(소유단체) :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 장흥군수
상 세 문 의 : 전라남도 장흥군 문화관광과 061-860-0228
장흥풍길리청자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현재 준비중입니다.
장흥 풍길리 청자요지는 고려시대 초기청자 가마터로 요도구(窯道具)와 제작 기종(器種), 입지조건 등이 자기(瓷器) 발생기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는 유적으로 학술적, 역사적 가치가 있다. 장흥군은 한반도 남단의 남해안에 위치한 지역으로 산과 평야, 강, 바다 등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지역으로 일찍부터 문화가 발달하였는데 특히 자기(磁器)가 한반도에 발생한 직후부터 그 기술을 받아들여 청자를 제작하였다. 장흥지역이 일찍부터 청자 제작기술을 받아들이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남해안에 접해 있어 바닷길을 통한 외부와의 문화 교류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 사회가 안정되면서 인근 강진 지역으로 도자 제작 기술이 집약되면서 장흥의 청자 제작은 쇠퇴한다. 즉, 천관산과 천태산을 경계로 국가 통제의 도자 제작을 담당하였던 강진의 대구소(大口所)와 인접하여 생산지보다는 소비지로서의 역할이 증대된다. 특히 장흥지역은 고려 중기에 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 任氏)의 고향이라 하여 정안현(定安縣)이 영암에서 독립 장흥부(長興府)로 승격하면서 영암군의 수령(遂寧)·탐진현(耽津縣)과 보성군의 회령(會寧)·장택현(長澤縣)을 속현으로 하였다. 따라서 탐진현(耽津縣) 내에 있으면서 자기를 생산하던 대구소(大口所)와 칠량소(七良所)도 장흥도호부 세력권에 편입되어 이곳에서 생산된 자기가 당시 치소인 장흥지역에 많이 유입되었다. 이는 용산면 모산리 청자상감투각귀갑문(靑瓷象嵌透刻龜甲文) 일괄 출토품(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최근 발굴 조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유치면 대리와 신월리의 고려시대 생활 유적과 고분 등에서 입증되고 있다. 고려말 조선초 이 지역은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그 피해가 매우 커 장인들의 유리(遊離)와 제작의 어려움은 청자의 질적 쇠퇴를 가져왔는데 장흥지역도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자기소(磁器所)와 도기소(陶器所)가 각 1곳이 기록되고 있으나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사기장(沙器匠)의 배치 기록이 없어 이후의 자기 생산은 민수용(民需用)으로 전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흥지역은 현재까지 청자 2곳, 분청자 4곳, 백자 30곳, 흑자 1곳, 옹기 7곳 등 모두 44곳의 도요지가 조사되었다. 이들 도요지는 크게 3지역 구분할 수 있는데 산악지역(21곳, 장동면 보성강 수계지역과 장평면, 유치면), 평야지역(4곳, 장흥읍과 부산면, 장동면의 탐진강 수계지역), 해안지역(19곳, 안양면과 용산면, 관산읍, 대덕읍, 회진면)들이다. 이를 보면 산악지역과 해안지역에 가마터가 집중 분포하고 있으며 평야지역에는 매우 소량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평야지역이 가마 입지 조건에서 중요 요소를 차지하는 땔감이 풍족하지 못한 때문으로 판단된다. 재질별로 가마터의 분포를 살펴보면 청자 가마터는 용산면과 회진면 등 남해안과 접해 있으며, 조선 초의 분청자는 안양면과 용산면 등 남해안 지역을 토대로 장동면과 유치면 등 일부 내륙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백자는 조선 중기 이후 전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는데 특히 장평면과 유치면 등의 내륙 산간 지역에 집중 분포되고 있다. 즉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가 일반 민수용으로 정착 대량 생산되면서 내륙지역까지 폭 넓게 확산되고 있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왜구들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많은 해안 지역을 피해 공방들이 보다 내륙으로 이동한 결과로 판단된다. 또한 산악지역의 풍부한 땔감도 입지 조건에 일조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용산 풍길리 가마터는 마을 뒤 두암저수지 주변으로 저수지 상류로 가는 농로를 따라 500여m 가면 농로에 갑발편과 가마벽편이 산재되어 있다. 이곳은 남동향의 급경사지로 마을에서 ‘도둑골’이라 부르는 곳으로, 가마 방향은 남-북으로 추정된다. 퇴적층은 일부만 확인되는데 대부분 갑발(匣鉢) 등 요도구(窯道具)이며 청자는 일부 확인되고 있다. 요도구는 가마에서 번조시(燔造時) 사용하던 원통형 갑발과 ㅠ자형 갑발 받침 등이 대부분이다. 갑발은 크고 작은 다양한 크기가 확인되는데 형태는 원통형으로 윗면 중심부가 낮은 M자 형이다. 이들은 매우 정성스럽게 만들었는데, 기벽이 얇고 몸체에 성형시의 물레 흔과 도구로 깎아 낸 흔적이 있다. 갑발 받침은 윗면이 다리 지름보다 넓은 유형이다. 윗면은 편평하지만 중심쪽으로 경사지며, 다리는 내경(內頃)되다 바닥부분에서 반전되어 가운데가 홈을 이루고 있다. 기벽이 매우 두꺼운데 특히 바닥부분이 가장 두껍다. 갑발과 갑발 받침의 태토는 굵은 모래와 기포가 많아 매우 거칠다. 청자는 대부분 작은 조각으로 기형을 알 수 있는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기종(器種)은 자기 발생기의 표식적 기형인 햇무리굽완을 비롯하여 대접과 접시, 병, 항이 확인된다. 태토는 짙은 회청색으로 가는 모래와 기포가 있으나 정선되었다. 유(釉)는 투명한 녹청색과 녹갈색 등이 많으며 청색이 감도는 회색도 있으나 탁하다. 또한 태토가 곱고 유색이 올리브그린을 띠는 것도 있다. 유약의 용융 상대가 고르지 않아 기면(器面)에 반점처럼 유가 뭉쳐있는 곳이 있으며, 대부분 빙렬(氷裂)이 있다. 유는 굽바닥까지 전면 시유 후 굽바닥은 닦아내었다. 4∼5개의 내화토 빚음을 굽바닥에만 받쳐 갑번(匣燔)하였다. 대접은 전반적으로 기벽이 얇고 측면선이 사선을 이루며 일부는 구연이 외반된 것도 있다. 굽은 낮고 밖으로 벌어진 것이 많으며 굽바닥이 넓어 안정감을 준다. 접시는 2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기벽이 낮게 세워지고 측면선은 곡선을 이루며 구연은 약간 외반되고 있다. 내저면(內底面)은 넓고 편평하며 굽은 낮고 밖으로 벌어졌으며 넓다. 다른 하나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굽은 밖으로 벌어지고 있다. 완은 햇무리굽으로 모두 내저면이 넓은 내저곡면식(內底曲面式)이다. 측면선은 곡면을 이루며 굽은 굽바닥이 넓은 것과 좁은 것이 있으며, 모두 밖으로 벌어지고 있다. 병은 구연편으로 보아 광구병으로 추정되며 구연은 직립시키고 있다. 장흥 풍길리 청자요지는 흑유와 도기도 소량 출토되어 초기청자 요지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다. 또한 전남지역에 산재한 강진 용운리와 삼흥리, 해남 신덕리, 고흥 운대리 청자요지와 유사한 성격을 보이고 있다. 특히 강진 용운리 63호 청자요지와 매우 유사하여 초기 청자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장흥 풍길리 청자요지는 요도구(窯道具)와 제작기종(製作 器種), 입지 조건 등이 자기 발생기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는 유적이다. 특히 유적 주변이 전혀 개발되지 않은 지역으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한 유적으로 학술적으로 그 중요성이 아주 높다. 또한 주변에 관련 도자문화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유산이 산재되어 있어 교육 효과도 매우 높은 유적이다.(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에 장흥풍길리청자요지의 주소가 '용산면 풍길리 산130외 일원'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안내표지판이 있는 위치는 대략 '용산면 풍길리 산 138-1'이다.
청자 요지를 찾기 위해 문화재청에 있는 주소를 찾아가니 저수지 부근에서 안내를 범춘다. 청자요지 같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큰길로 되돌아와 일손이 바쁜 농부에게 물으니 흰색으로 싸놓은 물건뒷쪽에 있단다.
이 길로 간다.
도로 끝부분에 안내판이 조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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